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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옥 Nov 22. 2021

올리브나무 사이로

학교에서 나와 만난 나의 아이들에게

 26. 신설 학교     

 또 남녀공학 신설 공립학교로 전근을 왔다. 중학교의 경우 신설 학교에는 처음에 1학년만 배정을 하는데, 모범적인 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을 배정한다는 소문이 있다. 신설 학교는 교사들이 학교를 만들어가야 할 형편이라 해야 할 일이 무척 많기 때문에 학생들 문제로라도 걱정을 덜어주려 그런다는 소문이다. 문서로 확인해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학교에서 좀 떨어진 아파트에서 배정을 받아 온 학생이 많았다. 이제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직 어린이라면 어린이인데,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와야 할 복잡한 등교 과정이 문제였다. 학교에서는 통학버스를 전세 내어 등하교를 도왔다. 버스를 함께 타고 등하교를 하다 보니 학생들 간에 우애도 더욱 돈독해졌다.

 1학년만 있으니 학교 규모가 작고 선생님 수도 적고 모두 그해에 함께 온 처지이고 하다 보니 가족 같은 분위기다. 1학년이 선배에게 시달릴 일도 없다. 학생들과 행복하게 지내다 보니 무던하고 행복했던 그 시절에 일어난 일들은 그 뒤로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게 떠오른다. 마음속에 오래 품고 생각하는 소중한 학생들이다. 

 1학년 여학생반을 맡았었는데, 우리 반 반장 유선이는 활달하고 서글서글하고 키도 컸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도 유선이는 그 시절이 참 행복했었다고 기억해 주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내가 잊어버린 일들도 하나하나 잘 기억하고 있었다. 선생님들이 유선이를 괜히 ‘컴퓨터’라고 불렀던 게 아니다. 머리가 명석할 뿐만 아니라 기억력도 무척 좋았기 때문이다. 어느 선생님인가 ‘쟤는 용량 큰 컴퓨터 같아’ 하셔서 모두들 유선이를 ‘컴퓨터’로 인증하였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조용한 성격이든 명랑하고 활발하든 상관없이 우리 반의 모든 아이들이 와글와글 재미있고 즐겁게, 사이좋게 지냈었다.  

                                                                                         

 27. 교실에서 레슬링을 하는 아이들     

 2학년 남학생반을 맡게 되었다. 그날도 점심시간에 올라가 보았다. 아직 학교에 급식 제도가 없던 시절이니 도시락을 싸 와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점심을 먹는다. 급식보다 도시락이 좋은 점도 많다. 둘러앉아 각기 다른 반찬을 나누어 먹는 재미라든가. 

 그날은 점심 식사가 거의 끝났을 무렵에 올라가 보게 되었다.

책상을 교탁 쪽으로 조금씩 밀어놓고 교실 뒤쪽을 넓게 만들어 아이들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 시골 장날, 씨름대회를 열었을 때처럼 겹겹이 빙 둘러 서 있다. 내가 교실 앞쪽 출입문을 열자마자 모든 아이들이 갯벌에서 사람 발자국 소리를 듣고 게들이 제 구멍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듯이 순식간에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교실 뒤편에는 두 아이가 버둥거리고 누워 있다. 레슬링을 하던 중인데, 둥글게 서 있던 아이들과는 달리 빨리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내 앞에서 볼썽사납게 버둥거리고 있었다. 우습기도 하였지만, 돌바닥에서 저러다 매우 위험할 수도 있기에 염려가 되어, 

- 반장!~ 레슬링, 이런 거 말리지도 않고 뭐 하고 있는 건가! 

하고 소리쳐 불렀다.

- 반장이 심판인데요.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중학교 남학생들과 살려면 매일매일 마음이 졸아든다. 어느 날은 유리창이 넉 장이나 깨져 휑하니 바람이 들어오기도 하고, 커튼이 쭉 찢겨 있기도 하고, 책상과 의자가 부서져 나동그라져 있기도 하고, 청소도구함에 빗자루가 몽땅 부러져 있기도 하고, 앞자리 친구가 30cm 자를 휘두르다 뒷자리 친구 눈두덩을 찢어 놓기도 하고, 급우들끼리 싸우다 코뼈를 부러뜨린 일도 있다. 

 어느 날은 천장에 실내화 자국이 다다닥 찍혀 있다. 천장으로 걸어 다녔을 리는 없고 신발을 벗어 던졌단 얘긴데,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신문지를 둘둘 말아 불을 붙이고 복도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올림픽 성화 봉송이라며 달려가질 않나. 매일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저 성화 봉송 사건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엄히 다스려야 할 일도 생긴다.

 담임은 참 할 일이 많다. 싸움이 벌어지면 누가 옳으니 그르니 심판도 해야 하고, 망가진 물건 목공실에 수선 맡기기 바쁘고, 누군가 다쳤다고 해서 놀라 양호실로 달려가는 일도 수시로 일어난다. 그래도 용케 큰 사고는 나지 않고 잘 지나갔으니 이것도 감사할 일이다.   

                      

 28. 현중이의 꿈     

 우리 반 현중이는 이다음에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다. 육사는 특별한 학교이기에 왜 육사에 진학하고 싶어 하는가 물어보았다.

 현중이의 아버지는 택시를 운전하는 기사이시다. 그런데 집안의 맏이였던, 현중이 큰아버지는 육사를 졸업하고 이제는 별을 단 장군이시다. 현중이가 볼 때 큰집 살림과 자기네 살림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많이 난다. 그래서 자기도 큰아버지처럼 육사에 입학하여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단다.     


 육군사관학교 입학생 중에는 꼭 군인이 되고 싶어서 오는 학생들도 있지만, 입학금은 물론 수업료를 전부 면제받기 때문에, 총명하지만 집안이 어려운 경우에 육사를 선택하는 학생들도 많다. 

 예전에는 집안이 어려우면 맏아들에게만 특별히 공을 들이는 집들이 많았다. 한 핏줄 한 집안은 공동운명체라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형이 성공하여 집안 전체의 가장이 되어 동생들을 돌보기를 바라서다. 맏형만 대학에 보내고 나머지 자식들은 고등학교만 마친다든가, 심지어 맏형은 대학에 진학했으나 나머지 형제들은 초등학교만 졸업하는 경우도 있다.

 현중이의 집안과 반대로 하는 집도 있다. 맏형이 희생하여 일찌감치 돈을 벌면서 동생들의 학비를 대는 것이다. 더군다나 맏이가 딸인 경우는 대부분 이런 방식을 택했다. 맏누나, 맏언니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수많은 누나, 언니들이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공장에 취직하여 동생들의 학비를 고향으로 부치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 세상일이 생각대로 흘러가는가. 그렇게 생각했던 조부모 세대와 달리 세상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형제는 공동운명체라는 생각이 희박해졌을 뿐만 아니라 농경사회와 달리 이제는 형제들이 사는 곳도 제각각이다. 자주 만나기도 어렵다. 맏형의 삶은 맏형의 삶대로 돌아가고 동생들의 삶은 형의 삶과 상관없이 따로 돌아간다. 형제를 위해 희생을 요구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29. 부장 선생님     

 우리 학교는 1,2학년만 있는 개설된 지 2년 차인 학교인데다가 규모도 작은 편이어서 교사 수도 적었다. 모두 친밀하게 지내고 있었다. 학교는 일반회사와 달리 교장, 교감 선생님을 제외하면 상사의 개념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냥 업무일 뿐이다. 교사들은 모두 평등한 관계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선생님이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부장을 맡고 계셨는데, 이분도 성품이 모나거나 악한 것은 아니고 뭔가 분별을 못하셨다고 할까. 나도 연구부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이분, 늘 가사도우미를 두고 유복하게 사셔서 그런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아직 교사 식당도 없고 학교 학생들에게 급식을 제공하는 시절도 아니었다. 교사들도 도시락을 싸 오거나 가까운 음식점에 주문을 해 점심을 해결해야 했다.

- 선생님, 교장 선생님 점심 뭘 드실 건지 물어봐 주세요.

 ‘뭐지? 내게 하는 소리인가.’ 건너다보았다. 나를 보고 다시 한번 저 말을 반복한다. ‘아니, 교장 선생님이 점심으로 뭘 드실지 그렇게 궁금하고 도와드리고 싶으면 자기가 가서 물어볼 일이지 나한테 왜? 이게 내가 이 부서에서 해야 할 업무에 해당하는가?’ 

 바로 뭐라 하기도 그래서 마음속으로 ‘이번 한 번만 들어 주자. 또 이런 일을 시키면 옳은 소리를 해야겠다.’ 생각하면서 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점심을 뭘 드실 생각인가 묻고, 그 선생님에게 알려주니, 중국집에 주문을 한다.     


 며칠 뒤에 또 이런다. 

- 선생님, 2학년 3반에 가셔서 영희 좀 불러주세요.

 어이가 없었다. 이번에는 들어줄 수 없었다. 빈방에서 좀 따로 보자고 했다. 그리고 뭐가 잘못된 건지 차근차근 설명하였다. 나는 선생님 댁의 가사도우미가 아니라고. 

 그 선생님이 이해하셨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그 선생님은 얼굴이 조금 붉어지셨고, 다시는 내게 저런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지 않으셨으니, 나로서는 문제를 해결한 셈이었다.                                                            

 30. 자유를 위한 변명     

 그 시절 몸과 마음이 참 힘들었다. 남편은 다른 지방에서 근무하고 주중에 한 번, 주말에 한 번, 또는 주말에만 다녀가는데, 딸과 아들은 어려서 손이 많이 가고, 가사 및 육아 도우미 할머니는 갑자기 못 오신다고 하니, 급히 도우미 할머니를 구할 수도 없어 딸아이는 열쇠목걸이를 하고 초등학교에 다니고, 아들아이는 유치원 종일반에 둘 수밖에 없었다.

첫날 종일반에 놓아두었을 때 아들아이는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니, 엄마가 다시는 오지 않으면 어쩌나 무척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퇴근하며 데리러 가니 아들은 하루종일 울다 지쳐서 조그만 자기 의자 아래 들어가 있었다. 엄마를 보고도 반길 기력이 없어 퉁퉁 부은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지금도 딸과 아들아이의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아침이면 딸아이 등교 준비, 나 출근 준비하며, 아들아이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바쁘다. 하도 몸을 이리저리 바삐 움직여 허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래서 1교시 수업이 비어 있는 날이 가장 좋았다. 아침 자습 지도와 조회를 마치고 교무실에 내려와 한숨 돌리고 커피도 한 잔 마시며 수업 준비도 하고 그날 해야 할 일도 차근히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인생에 회의가 들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어느 날,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을 돕는 조교 선생님이 내게 홍신자의 책 『자유를 위한 변명』을 선물로 준다. 홍신자는 나보다 나이가 17살 많은 현대무용가다. 『자유를 위한 변명』은 홍신자 자신이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미국으로 떠나, 어떻게 현대무용에 입문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기록한 자서전적인 글이다. 

 지난해에 우연히 조교 선생님의 생일을 알게 되어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했었는데, 아마도 그에 대한 보답이리라.

 홍신자의 글을 읽으며 여러 생각이 오고 갔다. 그는 무용하는 발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실제 발 사이즈보다 약간 큰 신발을 신는다고 한다. 물론 무용하는 발이라 그렇게 했겠지만, 하필 그때 나는 좀 작은 구두를 단지 디자인이 무척 예쁘다는 이유 하나로 구입하여, 억지로 신고 다니며 내 발가락을 괴롭히고 있었다. 내가 좀 더 심미적인 사람이라고 위로해야만 했을까. 여러모로 홍신자와 나는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사발이라면 나는 간장종지 정도 될까. 

 그의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며 문득 내 삶은 모조리 내 선택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 땅에 똑같이 여자로 태어나서 그는 그렇게 살고,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오로지 내 선택의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내게 중요한 깨달음이었다. 

 결혼도 나의 선택이었고, 아이를 둘 낳아 기르는 것도 나의 선택이며, 직업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나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삶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누구를 원망할 일도 없었다. 마음도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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