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한 배설

출근길 급똥 사건

by life barista

깔끔했다. 출근 복장이 아침 가을 햇살과 동시에 전신 거울에서 반짝거렸다. 상의는, 아이들이 생일 선물로 사준 하얀색 니트고, 바지는 얼마 전 홈쇼핑에서 산 밝은 베이지색 면바지다. 찬 바람을 막아줄 외투는 유광 베이지색이다. 얼핏 보면 사람 모양으로 구운 버터링 쿠키 같았지만, 검정과 회색에서 벗어난 스스로가 대견했다.


훈훈했다. 아침에 읽은 시는 ‘나의 천장은 누군가의 바닥’이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아침마다 카톡 인사를 나누는 형님은 평생 숙원이었던 수영을 배우는 중이다. 그는 수영에서 얻은 교훈을 이렇게 전해주셨다. ‘물에 온전히 몸을 맡기면 가라앉지 않는다. 억지로 헤엄치지 말고 순리에 맡겨라.’ 답례로 나는 읽고 있던 책의 한 부분을 사진으로 보냈다. ‘힘센 타인에게 의지하면 가지고 있던 것까지 빼앗긴다’는 내용이었다.


수상했다. 아침으로 먹은 콩물 때문인지, 1000mg 강화 비타민 때문인지 아랫배에서 뭔가 부글거렸다. 지하철은 서대문역으로 달리고 있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역에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알 턱이 없다. 그럼에도 자꾸 기억해 내라고 스스로를 갈궜다. 괄약근을 있는 힘을 다해 조였다. 양쪽 다리를 요리조리 비틀어 봉변을 틀어막았다.



도약했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무조건 계단 쪽으로 뛰었다. 서대문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내리는지 몰랐다. 코 앞에 어르신과 아가씨 사이 빈틈을 가장 낮은 자세로 뚫어냈다. 이후 두 계단씩 성큼성큼 점령했다. 바닥만 보던 머리통에 누군가의 엉덩이가 부딪혔다. 아저씨가 불쾌한 눈빛으로 날 잡았다. 하는 둥 마는 둥 미안하다고 대충 흘리고 냅다 뿌리쳤다. 여자분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도착했다. 아뿔싸! 빈칸이 없다. 사용 중이란 붉은 글씨가 엄중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급해서 그런데 끊고 나오실 수 있는 분 계실까요. 이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반가운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렸다. 쏴아. 철컥. 문고리가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마지막 칸에 쪼그려 쏴 자리였지만 지금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다.



냉큼 달려갔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6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어르신께서 바지 지퍼를 올린다. 문을 열고 옷을 정리하는 게 어르신 시대의 에티켓인가. 최대한 이해하는 척하면서 이상하게 웃었다.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을 한 채 꽈배기처럼 온몸을 꼬고 있는 나를 힐끗 보고 어르신도 씩 웃었다. 가진 자의 여유라는 게 저런 거구나.


급하게 쭈그려 앉았다. 외투와 가방을 옷걸이에 거는 손은 보이지도 않았다. 중심이 뒤로 무너졌다. 가까스로 오른손으로 벽을 짚었다. 참사를 막았다. 쏟아져 내렸다. 하마터면 26년 차 회사원의 명예에 똥칠할 뻔했다. 그제야 음악이 들렸다. 헤드폰을 여전히 쓰고 있었던 것이다. 베를린 필하모니가 연주하는 모차르트 심포니 No. 41. 모차르트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리듬감을 높였다.


몰랐다. 지하철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일단 하차하고 다시 타야 한다는 걸. 오늘 출근길은 두 배 비용을 냈지만, 이만하길 다행이다. 내려오는 계단은 3층 높이 정도로 까마득했다. 올라올 땐 전혀 몰랐던 계단의 열병식에 아찔했다. 이걸 다 언제 뛰어올랐지. 어쩐지 다리가 퇴근길 마냥 후들거린다.



경의선 숲길에 들어서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한 개의 단어와 문장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먼저 생각난 단어는 아브젝시옹(abjection).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주장한 정신분석 개념이다. 내 안에 있지만 내가 아닌 것. 그래서 그걸 보면 역겹고, 비참하고, 한편 두려운 것. 도저히 나일 수 없지만 아직 배설하지 못한 그것. 그게 언제 어디서 불쑥 나올지 궁금했다. 그때 나는 오늘 아침을 기억할 수 있을까.


이어서 떠오른 문장은 ‘가난은 사람의 얼굴로 세상의 오물을 닦는다.’ 루이-페르디낭 셀린(Louis-Ferdinand Céline)이 『밤의 끝으로의 여행』(Voyage au bout de la nuit)에 적은 것이다. 가난이 오늘 아침처럼 당장 해결해야 할 무엇이 된다면 난 어떤 짓을 하게 될까. 바닥만 보고 달리고, 온몸을 비틀고, 누군가의 엉덩이에 머리를 박고, 수없이 많은 계단을 오르고, 있는 자에게 부끄럽게 사정하겠지. 내 귀에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음악은 군가가 되고, 이 평화로운 가을 길은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가 되겠지.



나도 어쩔 수 없겠지.

그 가난이 무서워 다시 출근한다.

언제쯤 이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