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도망가지 않아.
도망가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야.
읽는 순간 몸이 굳었다. 메두사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 꿈이라는 단어는 늘 사람을 이렇게 만든다. 차가운 물로 하는 한겨울 세안 같다고나 할까. 꿈은 따뜻한 외모와는 달리, 꿈꾼 사람을 알싸하게 만드는 차가운 정신을 가졌다. 그렇다고 꿈이 그 사람과 멀리 떨어진 별나라에 숨어지내는 것도 아니다. 꿈은 자신을 품은 사람과 함께 묵묵하게 삶을 살아낸다.
대한민국 아버지라면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의무가 있다. 주거안정과 자식 뒷바라지가 그것이다. 최 부장도 이 의무들이 누르는 응급호출을 여러 번 받았다.
호출은 기가 막힌 타이밍에 울렸다. 먹을 거 아껴가며 몇 년을 모은 세계여행용 적금은 전세금 인상분에 쓰였다. 어쩌다 짭짤한 수익이 생기면 병원이 가져갔다. 짭짤한 맛은 쓰디쓰게 변했지만, 그래도 병원비를 미리 챙겨주신 하늘에 감사했다. 벼르고 별렀던 대학원 진학은 벼르기만 하다가 날이샜다. 아이들 학원비 때문에 차마 나도 공부하고 싶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았다.
그런데 짱구 아빠는 도망간 것은 꿈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 자신이라고 지금 최 부장에게 말하고 있다.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없는 날이 있던가. 계속 꿈꿨다면, 분명 어떤 모양새로든 그 꿈을 만났을 거다.
꿈이 삶을 응원하면, 삶은 꿈을 닮는 법이다. 결국엔 꿈과 삶이 하나가 된다. 그때까지, 꿈은 나서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팔을 땅에 끌면서 지친 모습으로 그 사람이 찾아오면,
그동안의 삶을 맑게 헹구듯 꿈은 웃는다. 그리고 주름만큼 지혜로운 백발 성자처럼 말한다. 기다리고 있었다, 늦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자. 꿈은 아무도 배신하지 않는다.
꿈은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 음지에서 계속 노력하는 한, 그 누구도 상처입히는 일은 없어.
꿈은 그 누구도 상처입히지 않는다. 꿈꾼 사람과 그 가족을 행복하게 만든다. 최 부장 가슴에 온기가 돌았다. 영혼의 낡은 보일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짱구 아빠 말대로 "내가 과연 이걸 할 수 있을까, 없을까?"는 걱정할 게 아니다. 내가 결정할 것은 이것뿐이다.
"내가 한다, 안 한다."
언젠가 사라질 것들을 바라서는 안 돼.
사라질 것들을 바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라고.
최 부장은 자신이 그동안 사라질 것들을 위해 참 오래 애써왔다고 느꼈다. 왜 사는지, 거창한 말로 나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지 물을 때마다 마땅한 대답이 없었던 최 부장은 "함께 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말이 만족스러웠다. 4대 성인들 말씀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은 것 같았다.
언젠가 아내가 동영상 하나를 추천했다.
온 가족이 낡은 버스를 타고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하는 내용이었다. PD가 어떻게 이런 용감한 결정을 하게 되었냐고 주인공 아버지에게 질문했다. 운전대를 잡은 아버지는 담담하게 답했다.
부장님, 부장님, 이렇게 불리는 게 어느 날 갑자기 서글펐어요. 아이들에게 아빠라고 기억되고 싶었어요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온 가족이 부둥켜 안고 우는 모습을 보면서 최부장은
따라 울었다. 왜 눈물이 났는지 그땐 몰랐다. 지금은 알 것 같다. 가족은 함께 놀기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존재 목적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부모는 돈에, 아이들은 공부에 매몰된 삶. 호카곶에 당당히 선 저 가족들은 하늘의 뜻을 거슬러 땅만 보고 사는 나를 구출하러온 119 대원들 같았다.
매몰되었던 사람에게 살아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으니, 어찌 감격의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짱구 아빠가 악당과 한 아래 대화가 왜 명대사로 분류되는지 알 것 같았다.
(짱구 아빠) 난 가족들과 미래를 살아갈 거야!
(악당) 시시한 인생이군
(짱구 아빠) 내 인생은 시시하지 않아! 가족이 있는 기쁨을 당신에게도 나눠주고 싶을 정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