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짱구는 못 말려-웃자 그리고 떠나자

by life barista

이건 웃자고 하는 말이니 오해 없으시길


『짱구는 못 말려』는 만화다. 만화의 의무 중 하나는 웃기는 것이다. 짱구 아빠의 명대사 중 아내와 관련된 것이 있다. 이건 분명 만화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즉 웃자고 하는 말이므로 아내도 이해할 것이라고 최 부장은 착각했다. 그래서 겁도 없이 아래 내용을 아내에게 읽어줬다.


아내를 고르는 것은 넥타이를 고르는 것과 매우 비슷해

고를 때는 멋져 보이지만, 집에 가서 목에 졸라 보면 실망하지.


최 부장은 오래간만에 실컷 웃었다. 옆에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건 실수였다. 너무 오래 웃은 건 큰 실수였고, 너무 크게 웃은 건 더 큰 실수였다.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비는 건 치졸하다. 아내도 나와 같은 생각이리라 믿은 건 가장 큰 실수였다. 아내가 보기에 내 행동은 죽자고 덤비는 것과 다름없었다. 사랑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아내를 넥타이와 비교할 마음이 최 부장에겐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 사실을 아내 또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건 그야말로 치명적인 실수였다. 이제 최 부장은 넥타이를 맬때마다 움찔한다. 아내가 뒤에서 지켜보기 때문이다. 짱구 아빠가 아내와 넥타이를 비교한 이유를, 최 부장은 매일 아침 목으로 느낀다.



짱구 아빠는 결혼과 결혼생활도 구별해 냈다. 그는 "결혼이라는 것은 훌륭한 것이지만 결혼생활이라는 관습을 갖다 붙이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최 부장도 이에 공감했다. 결혼생활은 이러저러해야만 한다는 관습이 오히려 결혼의 생명력을 박제해 버렸다. 박제된 채, 남에게 보이기 위한 쇼윈도 부부가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최 부장은 결혼의 훌륭함이 빚어낸 것들을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 빛나는 건, 역시 두 아이였다. 결혼이 자기에게 준 가장 큰 의미는 나의 자리를 공간이 아닌 사람 마음에 마련해 준 것이다. 광활한 이 우주 안에 나를 닮은 사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건 정말 훌륭한 일이다.

짱구 아빠는 남에게 호감을 사는 비결을 아내에게 귀뜸한다.


당신이 내일 만날 사람 중 4분의 3은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 어디 없나 하고 필사적으로 찾고 있어. 이 바람을 이루어주는 것이 남의 호의를 얻는 비결이야.


대다수 사람들은 자기 의견에 공감해 줄 사람을 찾아 헤맨다.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는 그 상황에 당한 내 편이다.

내가 남에게 바라는 건 남도 나에게 바란다. 내가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아군을 찾듯, 남들도 그러하다. 내 편이 많아질수록 적은 줄어든다. 따라서 생존 가능성은 커진다. 짱구 아빠는 이걸 정확히 알았다. 남의 바람을 이루어주라. 그의 의견에 공감하라. 그러면 호의를 얻을 것이다. 약삭빠르다는 느낌보단, 오래된 회사생활을 통해 체득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느껴졌다.

사표를 제출하고 난 후, 최 부장은 잠시 눈을 감았다. 23년 하고도 8개월의 세월이 소복하게 쌓인 책상 위에 걸터앉은 채, 그는 생각에 잠겼다.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회사만 아니라면 그 어느 곳이라도 좋을 것 같던 20대부터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지금까지, 회사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그건 사실이다. 변한 게 있다면, 그건 언제나 자기 자신이었다. 낙엽이 바람에 이끌려 이리저리 흩어지듯, 마음이 욕심에 이끌려 이리저리 흩어졌을 뿐이다. 변덕 심한 마음 때문에 애꿎은 동료들만 그동안 고생했구나 싶었다.


사표가 수리된다면 뭘 해야 할까? 가족들과 상의해서 긴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선임들이 우르르 퇴사하면 회사가 잘 돌아갈지도 걱정됐다. 없어지는 본부와 새로 생길 본부 사이에서 아끼는 후배들이 갈등하지 않고 잘 적응해 주길 바라는 마음은 덤으로 따라 나왔다. 오지랖 기질이 다시 작렬한 것이다.


최 부장은 갑자기 껄껄 웃었다.

짱구 아빠 명대사 중 가장 마지막에 적은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 대화를 다시 읽고 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볍지만 든든해졌다. 더 이상한 일은 눈으로만 읽는데, 익숙한 성우님들의 목소리로 들린다는 점이다.


(짱구 아빠) 그나저나 회사 일은 어떻게 됐을까?

(짱구) 아빠 걱정만큼 빈자리가 크진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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