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차장은 한없이 정직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누가 있든 없든 그는 자리를 지켰다. 일도 무난하게 잘 해냈다. 상사의 지시에 충실했고, 젊은 동료들에겐 후했다. 잦은 인사이동으로 적응하기 쉽지 않았지만, 새로 맡은 일들도 원만하게 처리했다. 회식 메뉴를 고를 땐 늘 같은 걸 선택했다. 선택이라고 하기보단 본능처럼 보였다. 어느 회사에나 손 차장 같은 사람이 한 명 정도는 꼭 있을 것 같았다.
집에서는 좋은 남편이자 아빠였다. 저녁 식사 후 설거지는 손 차장 몫이었다. 주말엔 빨래와 청소도 소리 없이 했다. 아내 일을 돕는다는 티는 그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건 대부분 들어주었다. 그 덕에 아이들은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했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책을 읽었다. 집에 그가 있는지 없는지 알려면 서재만 확인하면 됐다. 강아지와 산책이라도 가게 되면, 가족 대화방에 산책 코스와 소요 시간을 남겼다. 무의미한 표정과 특징 없는 삶을 그는 구도자처럼 해내고 있었다. 그는 가족의 한 사람이라기보다 가족의 배경에 가까웠다.
손 차장은 종이에 뭔가 열심히 적고 있다. 권태, 싫증, 따분, 지겹다, 지루하다, 단조롭다 등등 비슷한 의미를 담은 단어들을 끄적였다. 그의 삶에 신선한 자극이란 없었다. 출퇴근은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었다. 같은 시간대에 같은 위치에서 타는 지하철이라 오다가다 마주치는 승객조차 비슷비슷했다.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찢어진 청바지, 까만 선글라스, 긴 파마머리, 귀걸이, 문신을 하고 대학 시절 하드락 그룹에서 보컬을 맡았던 손 차장이다.
그가 개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증권맨 생활을 11년째 하고 있다. 그가 조용한 것엔 이유가 있다. 손 차장은 기질상 회사에서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회사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청동으로 만든 창업주의 흉상과 만나게 된다. 손 차장은 자기 가슴이 청동처럼 차갑게 변하지 않게 해 달라고 매일 아침 주문을 외웠다. 긴 머리를 출렁이면서 3옥타브 라까지 자연스럽게 소화했던 록커는 단정한 머리와 얌전한 음성으로 흉하게 변해 있었다. 적어도 손 차장이 보기엔 자기 모습이 그랬다.
이런 마음 자세로 사람들과 대화가 잘 될 리 없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필요한 말만 하고 입을 닫은 채 미소만 지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자신을 예의 바르고 조용하다면서 좋아했다. 손 차장도 어쩌다 말이 통할 듯한 사람에겐 속 내를 비추기도 했더랬다. 그러나 진심 어린 대화는 매번 동전처럼 땅에 떨어져 때굴때굴 굴렀다. 이런 일이 몇 차례 계속되자, 손 차장은 방어적 침묵을 하게 되었고, 이젠 체념적 침묵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저 생계형 임금노동자로서 적당하게 처신하면 그뿐이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노래? 그까짓것! “ 하며 발로 뻥 차 버렸다. 비록 바로 코앞에 떨어졌지만 말이다.
이런 회사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벗어날 희망이 없어 보였다. 가족들은 나 하나만 바라보고 있다. 연로하신 양가 부모님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에 가신다. 아내는 세상 물정을 모른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다. 직장은 숙주고, 가족은 기생충과 같은 상황이 좀체 역전될 것 같지 않았다. 지난 10년의 회사생활은 그걸 확인해 주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갇혀 있고 그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느낄 때 권태를 느낀다고 한다. 지금 손 차장이 딱 그랬다. 산소가 부족하면 졸리듯, 삶의 가치가 부족하면 권태로운 법이다.
이번 달 독서모임 주제도서로 뽑힌 책은 『달과 6펜스』였다. 손 차장은 늘 해왔던 대로 의례적으로 책을 샀다. 읽지도 않는데, 책까지 없으면 자신의 무관심이 너무 티 나기 때문이다. 무슨 영문인지 모임 주최 측에서 이번 달 발표자로 손 차장을 선정했다. 물론 손 차장은 처음엔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주최 측이 자신을 발표자로 선정한 그 이유가 엉뚱하면서도 그럴싸했다. 소설 주인공이 딱 하나의 인생 목표,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가족까지 버린단다. 주인공이 다니던 회사는 증권거래소이고, 그 결정을 한 나이는 마흔이란다. 그런데 마침 손 차장이 다니는 회사는 증권회사였고, 나이는 마흔이었던 것이다.
아내는 평소보다 책을 열심히 읽는 손 차장이 신기해 보였다. 남편에게 무슨 내용이냐고 물었다. 손 차장은 별생각 없이 주최 측이 전해 준 줄거리를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의 반응에 손 차장은 깜짝 놀랐다.
"개새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