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앵보옥’이란 발음은 속도를 절반으로 줄인 채 귀에 박혔다. 느린 만큼 아팠다. 자기 호흡조차 혼자 할 수 없어 코에 호스를 낀 분에게, 대소변을 기저귀에 보는 분에게, 음식을 입에 넣는 일과 씹는 일과 삼키는 일이 모두 뚝뚝 끊어져 각각 명령을 받아야 겨우 식사하는 분에게, 살이 썩는 고통마저 이제 느끼지 못하게 된 분에게, 난 어쩌자고 행복이란 가시 박힌 말을 그렇게도 또박또박 귀에 박아 넣었던가.
순간 어르신의 동공은 커졌다. 있는 힘을 다해 대뇌피질을 뒤지시는 것 같았다. 기억의 서랍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행복했더라. 언제였더라. 어느 때가 제일 좋았더라. 언제인가 있었을 텐데. 나도 행복했을 때가 이쯤 어딘가에 있었을 텐데. 행복하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간디. 아무리 못난 사람도 행복한 한 때쯤은 있는 거야. 더듬어보면 나도 분명 언젠가 행복했을 거야. 결혼했을 땐가? 첫 아이 낳았을 땐가? 가족여행 갔을 땐가? 내가 결혼했었나? 아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에게 아이가 있었나? 아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가족여행이라고? 난 가족이 없잖아.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누구였지? 지금 내 귀에 행복이란 말을 넣어준 그 사람은 누구지? 천사인가?
아, 내가 죽었구나! 천사가 지금 나를 심문하는구나! 내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검토하는 중이구나! 천사가 다 알면서, 나를 시험하는구나! 언제 행복했냐고? 그 행복의 기억이 나를 구원하는 걸까? 구원이라니?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누가 누굴 구원하는가. 천사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묻는 걸까. 어이, 이봐요, 천사 양반. 뭐 하나 물어봅시다. 행복이란 알량한 말은 그만둡시다. 도통 기억이 안 나요. 그나저나, 나는 누구요? 어떤 사람이었소? 당신 보기에 내가 행복해 보입디까?
어르신은 허공을 손으로 휘저으셨다. 반복되는 손 추임새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잘못된 질문을 꾸짖으시려나. 학생부로 불려 들어가는 노랑머리 학생처럼 주눅 든 채 어르신 쪽으로 고개를 조아린다.
“행복? 그런 적 없었어...... 그런데 당신은 누구요?”
치매에서 행복을 찾자고? 이 이야기가 내 답이야. 인생에서 의미를 찾자고? 이 이야기가 내 답이야. 바람이 불면 낙엽이 날리듯, 운명이 불어닥쳐 잠시 이 세상에 내가 날렸을 뿐. 행복과 의미에 너무 눌려 살지 마. 행복과 의미에 당신 인생을 빼앗기지 말라고. 행복 없어도, 의미 없어도 인생은 살아져. 나는 말이야, 말년에 치매만 아니면 좋겠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그 기억만은 가지고 가고 싶긴 해.
치매 노인 100명을 인터뷰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는 책을 기획하고 있는 작가는 그렇게 무너졌다. 인생의 행복과 의미는 기억일 뿐이었을까. 나는 누군가의 기억일 뿐일까? 그렇다면 치매는 나를 삭제하는 과정인가?
치매가 나를 삭제하기 전에, 나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면 안 되는 걸까. 작가는 존엄사로 생각을 옮겼다.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준비 중인 한국인이 107명에 이른다는 뉴스가 얼핏 생각났다. 치매가 나를 먹어치우기 전에, 내가 내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존엄하다는 인간의 권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