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나이, 출신학교, 지금 사는 곳 등이 술술 나왔다. 회원수첩을 만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얼굴은 나도 그날 처음 뵈었다. 흑백으로 인쇄된 반명함판 사진만 봤을 뿐이다.
요즘 기억력은 완전 꽝이다.
우산, 지갑, 열쇠는 내 것이 내 것이 아니다. 결재를 받으러 갔다가 중요한 내용을 깜빡하고 다시 들어갈 명분을 찾곤 한다. 녹차 티백을 종이컵에서 몇 번 올렸다 내렸다 하다가, 티백을 버려야 할지 종이컵을 버려야지 할지 망설인 적도 있고, 계단에서 오른발 왼발이 헷갈려 발을 헛디딜 때도 있다.
대형 사건도 있었다.
높은 사람들끼리 점심을 먹는 모임이었다. 회장님께서 몇 달 공들였다. 워낙 바쁜 사람들이다보니 시간 맞추기가 정말 어려웠다. 날짜가 정해지자 다행이다 자축하면서 일을 챙겨 나갔다. 사건은 모임 한 주를 앞두고 터졌다. 회장님께 다시 약속 시간이나 확인시켜드릴까 하는데, 애초 이 모임이 성사된 걸 보고했는지가 전혀 기억나질 않았다. 일단 비서실에 확인했다. 맙소사! 모임 날 회장님은 멕시코에 계실 예정이란다. 사실 여부를 불문하고 무조건 우겨야 했다. 그런데 정말 큰일은 지금 부터다. 이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내에게 건망증 이야기를 꺼냈다.
아내는 진작 그랬단다. 행주와 칼은 냉장고에서 여러 번 꺼냈고, 빤 속옷을 다시 빤 적도 있고, 이십 년 넘게 살아온 동네에서 잠시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단다. 그게 치매 어르신 봉사를 시작한 이유라고도 했다. 봉사를 다녀온 날이면 아내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한 시간 내내 같은 말씀을 들었단다. 남편이 때린 이야기, 집나간 아들이야기, 작은 아버지가 훔쳐간 땅 문서 이야기. 손님 접대하신다며 계속 주신 물을 다 받아 마셨단다. 아내 배에서 찰랑찰랑 물소리가 났다.
내 머리에서도 물소리가 들린다.
설거지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름, 나이, 가족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깨끗이 헹구는 소리. 나를 담았던 그릇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 이번엔 쨍그랑하는 소리. 내가 깨지는 소리. 이게 나라며 애지중지 했던 그릇이 건망증에 맞아 죽는 소리. 소리만 요란했지 괜찮다. 나란 처음부터 텅 빈 것이니까.
나에 대한 믿음이 대단했었다.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나 자신이라고 믿었다. 나로부터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첫 사람이자 마지막 사람이 나라고 믿었다. 한심했다. 이렇게 가볍게 깨질 거면서 왜 그렇게 무겁게 찾아 헤맸을까? 다 헹궈 질 거면서, 왜 꾸역꾸역 채우려고만 했을까? 이렇게 까맣게 잊을 사람이면서, 왜 그렇게 믿어달라고 떼를 썼을까?
나를 믿어달라고 했던, 나를 꼭 믿어줬으면 했던 두 사람이 있다.
엄마와 아내다. 아내가 마음에 들어와 박힌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까만 곱슬머리와 우유 빛깔 피부가 예술이었다. 참 얌전했다. 뭐가 하고 싶다거나 먹고 싶다거나 좀체 말이 없었다. 연예 밀당의 고수 또는 천사, 둘 중 하나였음에 틀림없었다.
14년 연예 끝에 나는 천사와 결혼했다.
아이 셋이 태어났다. 부러움 반 놀림 반, 다들 난리였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행복했다. 그렇게 기억한다. 하지만 아내 기억은 달랐다. 아내는 며느리였다. 아들과 사위는 절대 모르는 세계. 딸과 며느리만 아는 우주. 며느리발톱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가 뜨악했다. 영원히 한 몸이 될 수 없는 발톱. 며느리라는 말은 참 외롭고 무서웠다.
어머니와 나는 스무 두 살 차이가 난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처녀가 부산에서 상경해 결혼했고, 그 다음 해 바로 아들을 낳았다. 두 해가 지나 또 아들을 낳았다. 나와 동생의 나이 터울 동안 어머니는 안 해 보신 일이 없었다고 하셨다. 갓 돌이 지난 나를 업은 채 위암 말기 할아버지를 모시고 용하다는 곳을 찾아 다니셨다.
할아버지 대소변을 받아낸 것도 어머니셨다.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는 어떤 목사님을 찾았는데, 한 걸음 오를 때마다 죽을 각오를 해야 할 만큼 계단이 너무 높고 많았단다. 녹내장으로 앞 못 보는 시어머니는 이런 저런 사정을 안 봐주셨다. 반찬이 입에 조금만 안 맞아도 밥상을 엎으시곤 하셨다. 아버지는 늘 효자셨고, 효자 앞에 효부는 없었다. 두 아들들이 삶의 희망이었다.
나도 효자 노릇을 했다.
덕분에 며느리 자리는 더 좁아졌다. 엄마와 아내 사이에서 아들이며 남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선배들은 미주 왈 고주 왈 떠들었다. 하나도 안 맞았다. 설날과 추석 즈음마다, 나는 이간질 요괴 아니면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엄마도 아내도 모두 서운해 했다. 두 여자 사이에서 아들이자 남편은 남은 명절 음식처럼 식어갔다.
어찌 어찌 시간은 흘렀다.
아내는 어머니처럼, 어머니는 할머니처럼 늙어갔다. 그러다가 82년생 김지영을 만났다. 아내는 김지영 보다 아홉 살 많다. 그만큼 할 말은 더 많고, 그래서 더 많이 참아야 했다. 엄마는 김지영 보다 마흔 두 살 더 많으시다. 하실 말씀과 참아낸 시간을 나로선 알 길이 없다.
영화를 보면서, 아내와 엄마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세월 덕에 두 사람은 얼마쯤 더 가까워졌고, 또 얼마쯤은 더 멀어졌다. 아내 얼굴에서 엄마가 보였고, 엄마 얼굴에서 아내가 보였다. 거칠고 긴 세월 속에서, 두 사람은 엄마와 아내가 아닌 각자가 되어있었다.
“내가 그랬다고?”
엄마가 깜짝 놀라시며 반문하신다.
“그러셨다니까요!”
아내 목소리가 살짝 높다.
내게 사실 확인을 요청한다.
다들 알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사실이 아니다. 두 분의 기분이다. 웃음을 빵 터트릴 한 방이 필요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방귀를 빵 터트린다. 명절은 언제든지 일발 장전할 수 있어 좋다.
정나라 사람이 해질녘 신을 사러 장에 갔다.
신발 장수 앞에 선 그가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더니 어쩔 줄 몰라 한다. “여보게! 내가 발 치수를 적어둔 종이를 깜빡 잊고 집에 두고 왔네. 잠시만 기다려 주게.” 종이를 찾아 들고 허겁지겁 시장으로 돌아왔지만, 신발 장수는 이미 가고 없었다.
이를 지켜본 사람이 물었다.
“도대체 왜 신을 직접 신어보지 않았소?”
머리를 긁적이며 그가 대답했다.
“자로 잰 치수는 믿을 수 있어도 도무지 내 발은 믿을 수가 없었소.”
뇌에 적어둔 기억만 고집하면 건망증을 이길 수 없다. 기억은 못 박아 둔 게 아니다. 삶의 강 위에 떠다니는 나뭇잎 같다. 나뭇잎이야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떠오르는 게 일이다. 하지만 잠겼다 떠오른 사이 강물도 나뭇잎도 이미 예전과 같지 않다. 그러니까 흐르는 삶에서 믿어야 한 건 집에 두고 온 종이 같은 기억이 아니다. 가시밭 같은 삶을 걸어온 내 발이다. 삶의 지혜다.
옛 기억을 되찾아 따지기엔 시간이 많지 않다. 엄마도 아내도 그리고 나도 늙어가고 있다. 건망증 덕에 우리 모두 순해졌다. 그리고 지혜로워졌다. 바로 지금 여기서 당장 신발을 신을 수 있게 되었다. 아내와 엄마와 그리고 나의 발을 믿도록 건망증이 도와주었다. 서로의 발이, 인간 모두의 발이 많이 닮았다는 삶의 지혜가 또렷하게 떠오른다. 얼마나 다행인가. 매번 방귀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