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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공장 Nov 10. 2023

찐 자기 사랑의 실전편

이게 뭐라고 이렇게 힘든 거지?

가장 어려운 서재부터 대청소를 하기로 했다. 살면서 지금까지는 쉬운 것 위주로, 중요하지 않은 것 위주로 시작해서 결국 중요한 것은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 했는데, 이번에는 내 가장 많은 에너지를 가장 중요한 것에 쏟겠다 다짐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서재 청소.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종이 서류 정리를 가장 먼저 하는 것으로 잡았다. 청소라는 것이 정말 끝도 없고 쉽게 포기하기 쉬운 영역이다. 물건을 버리겠다고 언제부터 외치고 살았는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바야흐로 고등학교 졸업 후가 나온다. 즉, 아무리 봐줘도 10년, 올림해서 20년의 시간동안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며 잡고 있었던 것들을 치우려고 한다.


그동안 물건을 버리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2016년, 영국에 가방 달랑 두 개를 들고 갔을 때, 이미 나는 떠날 것을 생각해 물건을 사거나 모으는 것에 꽤나 신경을 썼다. 그러다 2016년이 채 가기도 전, 12월에 엄마와 동생이 놀러와 가방 두 개를 놓고 가면서 (!) 에라 모르겠다, 하는 생각으로 짐이 불어졌다. 그 뒤로 영국에 있는 3년동안 7번도 넘게 이사를 했고 (정확히 몇 번이나 이사를 갔는지는 다시 한 번 세 봐야 한다. 대략 일곱 번 정도 된다) 이사를 할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 집일 줄 알아 물건은 늘어났고 마침내 영국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그제서야 내가 쌓아 두고 있던 것을 보게 됐다.  


중략하고 결론만 말하면 그때부터 그나마 물건을 잘 버리게 됐고 아주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거의 사지 않는다.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내가 그동안 부모님 댁에 쌓아 놓고 도망갔던 물건들을 보자니, 죄송스러웠다. 매번 해외에서 돌아오면서 짐을 내팽개치고 또 가볍게 떠나니, 그동안 쓰레기를 투척하고 도망가던 것과 뭐가 다를까… 그래서 2020년 팬더믹으로 한국에 돌아와서는 대대적인 버리기를 했다. 


그렇게 버렸는데 버리지 못한 게 있다면, 종이.


종이, 종이 문서, 공책, 책은 나의 약점이다. 덧붙인다면 필기구에 미술/취미 용품까지랄까? 이것들을 청산하겠노라 다짐했다.


작전을 다르게 짜서, 정해진 시간 안에 버리기로 했다. 아, 처음에는 시간 안에 버리고 정리하는 것까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리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그동안 버리는 게 어려웠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정해진 시간에 버리기로. 사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그냥 다 가지고 있어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러면 그 상태로 앞으로 10+년 이상을 더 살 것 같아서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러지 않기로 결단했다!!!!!!! 그러나, 이 결단은 첫 주자인 종이 앞에서 바로 깨어진다.


원래 계획은 다음과 같다:


<<목요일>> 

830~1230 서재 

종이 문서 1.5

공책 2시간

책 0.5


1230~1330 점심 휴식시간

1330~1430 서재 

미술 및 아트 용품 / 필기도구 1

영수증


1500~1630 옷방 1.5hr 

옷 / 가방  

이부자리 

수납장 / 양말통 


1700~1900 부엌 

아랫 선반

윗 선반 1 음식/차

식기구/ 보관용기

(캠핑용품)

건강보조식품

싱크대

싱크대 옆

냉장고


저녁?

일지 쓰기/브런치 올리기


저녁 8~ 개인 일정


어젯밤 내가 준비 한 것은 종이 서류를 책상 위에 모은 것. 모은 것을 보고 나니 한 시간 반이 정말 가능한 시간인가 하는 의문이 든 채로 잠자리로 갔다. 꼭 안될 것 같은데 시간을 바꾸지 않았던 것은 다른 물품들까지 생각하다 보면 일주일 안에 안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을 넘길 수 없었다! 다른 할 일들이 있기에!)


오늘 아침 7시에 전화 약속이 있어, 7시에 일어나 전화를 하고 다시 잤다. 8시에 다른 전화 약속이 있어 8시에 일어났다. 8시 10분정도에 전화가 끝나고 아침을 준비하고 잠을 깨다보니 8시 30분이 됐던 것 같다. 아침을 서재로 가져왔지만, 책상은 이미 포화 상태다. 


아침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종이 문서에 뛰어들었다. 종이 문서를 보다 보니 그 자체로는 필요 없어 버릴 것인데 안에 있는 내 메모, 누군가의 연락처 등을 따로 기록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사진으로 찍어 놓고 버리기에는 보고 바로 버리는 게 빠를 것 같아서 한꺼번에 버릴 종이 상자에 분류했다. 이번 과정에서 ‘버릴 것’만 생각했지, ‘기록할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원래 서재 끝나고 옷방을 하기 전에 30분의 쉬는 시간을 넣었는데 그때 해야 하나 싶었다. 


배가 고파 아침을 먹으면서 하려니 이도 저도 안되고 아침 먹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아침을 들고 부엌으로 나갔다. 하나에 집중하자!


종이를 보다보니 참 웃긴 메모를 발견한다.


“각 잡고 물건 버리기”


그래, 그걸 지금 하고 있다.


이런 걸 하겠다, 저런 걸 하겠다, 하는 메모들이 많았고 신기하게도 거의 대부분을 다 했다. 나에게 메모로 계속 상기시켰던 것 같은데 결국 하겠다고 결단하고 실제 행동을 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일련의 예로 아마존 출판도 그랬고 영국에서 책 행사를 하고 오겠다는 것도 그랬고 국내 강연도 마찬가지고, 소설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약속했던 시간이 되었다. 종이 서류를 다 보지 못했고 미리 잡았던 시간이 끝났다. 


“지금 하는 반복된 것만 빠르게 기계적으로 하고 적거나 정리 같은 건 시간을 따로 갖는다면?” 


이 말이 이때까지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책상 위는 난리였지만, 뒤로 한 채 모든 공책을 소파 위에 올려놓았다. 얼만큼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 줄로 정렬을 해보니 적어도 일 미터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유럽피안 넓은 소파의 1.5인석을 차지했다.


하루가 끝날때마다 노트를 정리하고 비우는 걸 배웠는데  글쓰기와 관련되지 않은 메모 노트는 노트를 비우고 정리할 시간을 매일 가져야 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스케줄을 더 비워야 한다는 것도… 2019년부터 모든 것을 디지털화하고 싶었던 것도 떠올랐다. 글쓰는 아이디어도 마찬가지로 디지털화 할 수 있겠다. (일단 이번 비움을 하자!)


단지 열심히 살았다는 걸 보여주는 노트들이 있다. 달력 일기처럼 내가 매일 무엇을 했고 그때 느낌이 어땠는지 적어놓은 것인데 지금 나에게 필요하지 않고 더이상 가지고 있지 않아도 되는데 버리기가 어려웠다.


카메라로 찍어서 보관해야 할까? --> 디지털 정리가 훨씬 어렵다고 느껴진다. 디지털이 되어보면 

전혀 찾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해 그냥 사라진다는 걸 경험한다. --> 어쩌면 이게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사진을 찍는 게 필요할까? 그냥 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 -> 아직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위안이 필요하다. 보지 않지만 있다는 자체로 오는 위안.


매번 노트 사용이 끝나고  한 달의 유예 기간을 두고 정리하지 못하거나 가지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버리기로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기록은 중요해 라는 약간의 변명? 혹은 머리 뒤 외침이 있다.


어떤 다이어리는 그 자체로 그걸 적을 때의 느낌으로 돌아가서 놔두려고 한다.


지금 사용하느랴 여부를 따지면  글 쓰려는 거 메모 한 것 & 아이디어 기록 등 밖에 없지만 몇몇 다이어리는 읽지 않아도 남기고 싶다.



다시 내가 이 행동을 왜 하느나를 다잡게 됐다. 


<<과거를 청산한다>>

+ 어떻게 하고 싶은 지 결단을 하자!

+ 지금까지 과거를 끌고 갔다. 지금까지와 같은 방법으로 하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 근데 그렇게 새로운 것들을 할 수 있을까?

+ 정말 중요했던 거라면 "할까 말까" "가지고 있을까 말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버리고나서 후회한다면 그 과정을 경험해야 한다. 행동을 하지 않으면 결과는 없고 계속 고민만 하게 된다.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집착 때문이라면 더더욱 내려놓기를 이번에 연습하자. 내가 이번 도전을 하려는 이유는 과거에서 해방되기 위해. 충분히 현재에 가볍게 살기 위해.

+ 여행을 간다면 & 당장 달랑 가방 하나만 들고 떠나야 한다면? —> 그때도 필요할까? & 지난 날 쓰지 않았다면???? 현재 나에게 영감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들로만 남기자



내가 정리 하고 싶다고 했는데 하지 않으려는 걸 봤다. 종이 문서와 공책을 다루는 부분이 감정이 많이 쓰이는 부분인데다 정말 나에게 돌파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스케줄을 조정해서라도 오늘 안에 끝내보기로 했다. 




그래서 바꾼 일정:

830~1230  책 


1230~1300 점심

1300~1330 부엌

아랫 선반

윗 선반 1 음식/차

식기구/ 보관용기



1330~1500 종이 문서

1500~1800 공책


1800~1830 저녁

1830~1900 부엌

건강보조식품

싱크대

싱크대 옆

냉장고


일지 쓰기 19~20

20~ 일정



내가 읽고 싶은가라는 기준을 가지고 생각보다 짧은 시간 안에 책을 골라냈고 생각보다 많은 책들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런데 남긴 책들 중에도 더 내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부는 종이 버리는 통에 넣고 일부는 판매하려고 했다. 가족들한테 돌려줄 책도 있었다.


더 단순하게 해보라는 말에 그냥 버리라는 건가 싶었다. 

멀쩡한데 그냥 버리라고????


뿌리 깊은 신념 하나가 떠올랐다. 물건을 생산하는데 사실 엄청난 에너지와 자원이 들고 그걸 활용하지 않고 나의 편의로 인해 버린다는 게 정말 괜찮지 않다는 걸 나눴다. 꽤 오랫동안 비건이었던 것도 기후 변화쪽에서 일하게 된 것도 자원의 순환과 낭비의 관점이 크게 작용다는 걸 나눴다. 


한국에 들어올때쯤 번아웃 등으로 내가 편하게 살자, 그냥 일회용품 사용하고 쓸 수 있지만 버리고 싶은 것들은 버리자, 라는 생각으로 예전 보다는 편하게(?) 살고 있는데, 아직은 지구를 위해 재사용하지 않고 버리는 과정이 괜찮지 않다고 경험됐다. 과정을 진행하면서 시간 안에 쉽게 떠나 보내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건 아는데 걸림이 있다.


다음주 화요일까지 어떤 방법이든 치우겠다. 그 안에 처리하지 못하면 버리기!



1시까지 점심을 먹겠다고 했는데 또 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대신 점심을 먹고 1시 30분까지 부엌을 끝내기로 했다.


부엌:

아랫 선반

윗 선반 1 음식/차

식기구/ 보관용기


정리를 하다 보니 무엇이 어디 있는 지까지 보게 되었다. 부엌은… 사실 정리할 물건이 거의 없었다. 내 담당이라기 보다는 파트너의 담당 영역이었고 그의 캠핑 용품도 산재해 있는데다가 딱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점심 먹고 예정됐던 시간보다 적게 있었지만, 부엌 정리를 시간 안에 마칠 수 있었다. 청소 하면서 발견한 오미자 차를 마시며 오후 시작!


1330~1500 종이 문서


3시까지 종이 문서 분류하고 그 안에 있는 정보만 필요한 게 있다면 시간 안에 사진찍기까지 하겠다고 다짐했다.


종이 문서를 버리면서, 

특히 학교 다니고 일하면서 가지고 다니던 걸 버리면서 


많은 정보를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고 킵했던 이유가 내가 부족하고 알지 못하니 다 알아야한다는 생각에 보지도 않으면서 가지고 있었다는 걸 봤다.


즉, ‘나는 지금은 부족하고 아는 게 없지만 가지고 있으면 언젠간 언젠간 보고 다 알겠지’, 라는 위안이자, 동시에 다 알지 못한다는 걸 상기 시켜주는 수단으로 절 억압하고 있었던 것들이 많았다.


4년 전쯤부터 내 목표는 무조건적인 자기 사랑. 이번 6월 달에 그걸 얻었고 지난 달 런던 가서 완전히 제 것이 됐다고 생각했다. 이번 청소는 찐 사랑의 실천편!


필요하고 중요한 문서들  & 언제라도 필요한 문서를 파일철에 끼워서 쉽게 찾아 볼 수 있게 작업이 필요했다. 언제 할까 생각했을 때, 정했던 화요일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스케줄 표에는 일과 끝나고 적어보기로 했다.



--> 본질이 정리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동안 못했던 건 버리는 것이다. 그럼 버리는 걸 지금 해라. 제일 어려웠던 걸 지금 해라.


1500~1800  공책


아침에 했던 부분들도 더 버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올라오지만 일단 내려놓고 공책에 집중하기로 했다.



한꺼풀한꺼풀 나와 이제는 상관없는 것들이 벗겨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국에서 돌아와서 느꼈던 ‘헉, 이건 나랑 맞지 않아’ 라고 느낀 그 감정을 상기하면서! 작업하자!!

그러나, 변명이 계속되자, 그정도로 빠져나가고 싶은 어려운 도전이라는 게 계속 느껴졌다. 앞으로도 변명이 계속 올라오겠지만, 계속 부딪혀보자!!


노트 하나하나 읽다보니 많은 노트에서 버려야 한다고 메모해 놓았더라. 결국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리 다짐하고 나에게 상기해도 일어나지 않는다


20대때 원하고 원한다고 말하고 하고 싶다고 말한 것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알아서가 아니라 준비가 되서가 아니라 그냥 지금 행동했기 때문에


20대에 자주 등장하던 키워드는

물건을 버리자

돈 벌자

글쓰기 / 창작

여행 / 언어 (--> 이 둘은 됐다)

그림/ 디자인/ 악기에 대한 갈망


아이패드도 사실 그림 그리려고 샀던 거라는 걸 기억하면서 그림 다시 그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떤 노트 둘은 나한테 정말 필요한 것들이 적혀있었는데 어디 있는지 몰라서 활용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자주 볼 수 있는 곳에 놓고 자주 봐야겠다.



정리를 다 했다고 보니, 그렇지만…분명 버렸는데...... 양을 비교해보니 전과 별로 차이나지 않아보였다. 물론 아직 쓰지 않은 공책 / 사용 중인 공책도 포함이라고 위안해보았지만… 좌절이다. 오전이랑 같은 상태인 것 같다.



저녁 18~19

18~1830 저녁

1830~19 부엌

싱크대

싱크대 옆 / 건강보조식품

냉장고



저녁 준비를 하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재에서 나오니 메타인지가 발동이 되어서 그런지 안 해본 걸 해보자, 집착을 놓아보자, 가 생각나면서 프리라이팅 썼던 노트들을 그냥 보내줘야겠다는 결단이 섰다. 일단, 스케줄을 따라 앞으로 움직이지만, 진짜 내가 그동안 해왔던 만큼의 정리가 아니라, 완전 새로 태어난다는 생각으로 하기로 결심했다. 


저녁 준비를 끝나자 6시 30분이었고, ‘그래 부엌을 빨리 끝내자’하는 마음이 들어서 밥을 먹으면서 남은 부엌을 치우니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저녁 때 명상에 관해 배웠고 노트 필기 한 걸 자기 전에 바로 정리해서 여기에 적어보려고 했는데… 흑, 다짐 첫날부터 좌절, 오전 1시 30분이다. 일단 자야겠다. 이번주에 하지 않으면 버리자!


내일은 나머지 집의 모든 부분이 남았다!!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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