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슨 포드가 나오는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에서 영화 배경으로 나왔던 페트라를 다녀왔다. 요르단 서남부에 위치한 고대 도시, 페트라는 고대 아랍계 민족인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이다. 이곳의 건축물들은 외관이 부조로 정밀하게 조각되어 있고,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붉은 바위산의 사암을 깎아서 만든 건물들의 내부에는 동굴처럼 파놓은 공간들이 있다. 상상으로만 그려왔는데, 이곳의 지형, 건축물의 형태가 아주 독특했다.
페트라(Petra)는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이다. 원래 나바테아인들은 레켐(Rekem)이라 불렀다고 한다. 서기 106년, 세력 확장을 하던 로마에게 이곳이 합병되면서부터 그리스인들이 부르던 '페트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페트라는 기원전 1세기 경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고, 로마에게 합병된 후에도 번영을 지속했었다. 4세기 중반 큰 지진 후 물관리 체계가 파괴되면서 도시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후 6세기경에 일어난 지진으로 완전 폐허가 된 후, 서양세계에서는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19세기에 스위스인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Johann Ludwig Burckhardt)가 페트라에 관한 소문을 듣고, 숨겨진 보물을 찾으려고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여기 살고 있던 유목민 베두인들은 이곳 어딘가에 찾지 못한 보물이 숨겨져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베두인은 외부인의 접근을 막았다.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는 이슬람교도로 위장하여 베두인과 교류하면서, 1812년 페트라를 발견하였다. 그 후 이 도시가 유럽에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페트라 유적의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건조지역이라 습윤한 지역에 비해 풍화, 침식을 적게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또 주변이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곳을 차지하고 있던 이슬람인들은 우상화를 막겠다는 종교적인 이유로 조각의 얼굴 부분만 제거했다고 한다. 다른 부분이라도 남아있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현재 이곳에는 일부 베두인들만이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이곳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도 나온다. 오래전 광야 생활을 하던 모세가 페트라 부근을 지나갔던 내용이 '출애굽기'에 있다. 페트라 부근 마을에는 '모세의 샘'이라는 큰 샘이 있다. 광야를 지나면서 목마른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치자 샘물이 솟았다는 곳이다. 지금도 식수로 사용하는 맑은 샘물이 건조한 바위 사이에서 나온다. 배탈이 날까 봐 겁이 나서 마시지는 못했다. 페트라에서 사용하던 용수는 이 샘을 비롯해 주변 오아시스의 물을 모아서 공급한 것이라고 한다.
체계적인 수로의 일부를 협곡 길 '시크'에서 볼 수 있었다. 계곡 한쪽에는 생활용수와 가축을 위한 수로가, 다른 한쪽엔 식수를 공급하는 수로가 남아있었다. 이 도시의 번영은 뛰어난 치수사업과 물 저장 시설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페트라의 동쪽 주요 출입구인 시크는 두 개의 산이 쪼개지면서 형성된 꾸불꾸불한 협곡이다. 입구에서 1km 정도 걸어가면, 시크 1.2km가 시작된다. 신비함이 느껴지는 이 길이 끝나는 지점에 페트라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잘 알려진 '알카즈네(보물)'가 나타난다.
이곳에는 여러 가지 유적군이 존재한다. 페트라는 기원전, 후에 걸쳐 오랫동안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중개무역과 교통의 요지로 번성했다. 산재해 있는 무덤, 사원, 물탱크나 집수지, 상인들의 정기 숙영지는 나바테아 유적들이다. 화려하게 보이는 페트라의 유적은 로마의 영향권 아래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많다. 사암 절벽에 정교한 조각, 구조물, 기념비들이 남아있다. 그리스 로마의 건축 양식에다 고대 아람 지방의 스타일이 혼합된 독특한 양식이라고 한다.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동쪽 주요 출입로인 ‘시크’는 아주 붐빈다. 전기차가 운행되고 있었지만, 협곡의 분위기를 직접 느끼고 싶어서 더위를 무릅쓰고 걸어 다녔다. 그러다 돌아 나오는 길에 사고가 생겼다. 출구를 향해 시크를 걷기 시작했다. 멋진 지형이 나타나자 지인들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면서 폰을 잠깐 옆에 놓아두었다. 입구를 향해 한참 걸어 나오다, 폰이 없어졌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에는 폰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잘 몰랐다. 가장 유력한 장소로 꼽힌 사진 찍던 곳을 향해 기도하는 맘으로 달려갔다. 시간이 많이 지났기에 찾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신없이 뛰어가는데, 그 길이 엄청 길게 느껴졌다. 도착해서 보니 역시 폰은 없었다. 역시나 하고 돌아서는데, 건너편에 앉아있던 청년들이 이 폰을 찾냐고 물었다. 돌려받으며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그들은 페트라 쪽으로 갔고, 난 일행들이 기다리는 출구 쪽을 향해 뛰었다. 땀범벅이 되어 돌아온 나에게 요르단 가이드는 '기적'이라고 했다. 폰을 찾으러 갈 때, 나 역시 찾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가방 속에 있는 휴대폰도 소매치기당할 수 있는데, 밖에 놓아둔 폰이야 가져가라고 내준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여행 중 작은 친절에도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으니, 달러를 여유 있게 준비하라는 얘기를 들었었다. 폰을 찾아준 청년들이 사례비를 요구했다면 당연히 주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들에게 정말 많이 고마웠다. 순수하게 베푼 친절에 감사한다. 여행이 끝난 후, 공항에 마중 나온 남편에게 이 기적 같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남편은 잃어버린 후 찾게 되는 기적보다 잃어버리지 않는 게 더 좋은 거 아니냐고 농담처럼 이야기한다. 폰을 되찾았던 그 기쁨이 평가절하 되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찾은 폰을 보면 감사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늘 존재하고 있는 공기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듯, 항상 곁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에게 감사함을 잊고 살아왔다.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닥쳐야 평안한 일상이 얼마나 고마운 줄 아는 어리석은 인간이다. 남편 말이 맞다. 잃어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 더 기적적인 일인데,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고마움을 안다. 일상 속에서 만나는 대상에게 고마움을 세세히 느끼고, 표현하며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어쩌면 이것이 한 차원 더 높은 기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