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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빈나 Dec 19. 2020

캐나다 어린이집, 환상과 현실 그 사이 - 8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캐나다를 사랑하는 이유

그동안 내가 쭉 썼던 브런치 글을 살펴보는데, 왜 이렇게 부정적인 내용만 썼는지!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마치 내가 악덕업주에게 고용되어서 외국인노동자로서 고생만 하고 온 건 아닐까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났다. 지독하게 전쟁통 같아서 그랬지 나 그래도 나름 재미있고 유익한 경험을 하고 온건데!


나는 아직도 종종 캐나다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직도 옛 동료들에게 페이스북 메신저가 오거나, 내가 담임을 맡았던 아이의 엄마에게서 아이의 근황이 담긴 사진과 메시지를 받을 때면 캐나다에서의 좋았던 경험들이 마구마구 생각난다. 7편에서는 기억을 미화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그래도 좋았던 기억들이 훨씬 많았으므로 미화가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나보다. 마음만 먹으면 오늘이라도 당장 짐을 싸서 비행기를 타고 가면 그만이지만, 코로나 때문에 불안한 마음으로 미루고 미루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다시 가고는 싶지만 갔을 때 느껴야 하는 그 불안감들을 다시 경험하기 무서워서 이렇게 미루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굉장히 재밌는 사실은 캐나다에서 만난 동료들과 양육자는 연신 나에게 "When are you coming back?" 이라고 물어본다. 언제 돌아오냐고! 나는 한국사람인데, 캐나다에 언제 다시 돌아오냐고 물어보는 표현이 너무 웃기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정말 내가 살아야 하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지금 한국에 잠깐 머무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캐나다에서 잠깐 머물렀던 것인가. 라는 혼란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캐나다에서 보냈던 그 시간들이 참 감사하다. 인종차별을 당했어도, 지독한 정치싸움에 휘말렸어도, 영하40도에 눈길을 뚫고 출퇴근을 했어도, 힘든 상황에 놓은 아이들을 많이 만났어도, 나는 그때 경험했던 그 모든것들이 나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억들이다.


나는 캐나다에서 정말 다양한 모습과 연령대의 여성들을 많이 만났다. 공사장을 스쳐지나갈 때, 포크레인을 몰고 있는 여자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고, 마트를 가더라도 딱 보기에 10대 후반쯤 되어보이는 여자아이부터 50~60대 여성까지 모두 만나볼 수 있었다. 아이 엄마 중에 군인도 있었기 때문에 군복을 입고 아이를 등하원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택시를 타거나, 버스를 타도 여성 운전자를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다. 또 집 근처 펍을 가면 지팡이를 짚고 하얀 백발의 할머니가 맥주를 마시면서 깔깔 웃고 있었다. 또 만삭의 배를 가지고 옆구리에 총을 차고, 순찰을 도는 경찰도 만날 수 있었다. 또한 어린이집에서도 20대 초반부터 50대 후반까지. 정말 다양한 연령대의 선생님들이 많이 있었다.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 속에서 다양한 모습의,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을 많이 만났는데 처음에는 그 모습이 그렇게나 어색하고 신선했다. 처음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다양한 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신선했지만, 나중에는 다양한 여성들에게 더욱 관심이 갔다. 나도 꽤 성고정관념에 휩싸였던 사람이었는지 "여자가 버스기사를? 여자가 포크레인을?"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멍청한 발언이긴 하지만, 나는 살아오면서 그렇게 다양한 모습의 여성을 못 만나봤기 때문에 저런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야 페미니즘, 성인지감수성, 성평등 등 성 고정관념과 성차별, 성편견을 없애자는 목소리가 크게 나오고 있긴 하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아니 내가 20대 중반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목소리가 유난으로 느껴지긴 했었다. 일상 속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캐나다에서 나는 많은 꿈을 꾸었다. 한국이 나쁘다! 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은 마치 누군가가 짜놓은 마라톤에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도착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주변에서 "탈락탈락!"을 외쳐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빠르고, 그 누구보다 급박하게 달려야 한다는 생각에 주말에도 쉬지 않고 뭔가를 해야한단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정해진 나이에 결혼을 해야했으며, 정해진 나이에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입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마치 누군가가 정해놓은 사회적 룰을 어기고 결혼 적령기인 20대 후반~30대 초반에 캐나다로 떠나게 되었다. 캐나다에 가서 취업을 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캐나다 갔다가 한국에 돌아오면 30대인데 결혼은 어떡하지, 그 때 다시 재취업을 할 수 있을까 등등 이미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잠을 못이룬 적이 한 두번이 아닌 것 같다. 실제로 내가 함께 캐나다로 떠나자고 제안했던 친구들 중 몇 명은 당시에 남자친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럼 결혼 적령기가 지나서.. 지금이라도 좋은 남자를 만나야해서"라며 거절을 하곤 했다. 그러나 캐나다에 자리를 잡고,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직업을 지닌 여성들을 만나면서 나도 꿈을 꾸었다. 한국에 돌아가서 취업을 못하면 어떡하지, 결혼을 못하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에서 벗어나서 내가 하고싶은 것이 무엇인지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다시 공부가 하고 싶어졌으며, 다시 도전을 하고 싶어졌다. 나는 꼭 '엄마'가 될 필요가 없었으며, '엄마'가 된다하더라도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대단한 곳에 취업을 해서 많은 돈을 버는 꿈이 아니라, 내 자아를 지키며 나의 삶을 행복하고 즐길 수 있는 그런 꿈.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불안함을 떨지 않고 지금 경험하는 이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꿈. 그렇게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다시 그 마라톤 안에 맞춰 뛸 수 있을지 알아야했고, 다시 불안감에 잠을 못 이루고는 했다.


그렇게 일년이 지나고, 나는 한국에서 마라톤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하기로 했으며, 그렇게 나만의 길을 찾아가기로 했다. 안정적이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고난들이 닥쳐올 때도 있지만, 나 역시 누군가의 새로운 여성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서야, 30대가 되서야 더 많은 여성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우리 인생에는 더 다양한 롤모델이 필요하며, 더 다양한 서사가 필요하다. 정해놓은 마라톤에서 맞춰뛰지 않더라도 그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며, 같이 공감하며 손을 잡고 천천히 뛸 사람이 필요하다. 일상 속에서 더 많은 여성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여성이 더 많은 공간에서 존재했기 때문에, 나도 같은 여성으로서 더 다양한 꿈을 꿀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캐나다를 사랑한다. 나에게 다양한 여성을 일상 속에서 만나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 알려주었기에, 그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몸소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캐나다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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