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바뀌는지는 말 안 했잖아.
한전에 일찍이 합격해서 일하던 친구는 정규직 문턱을 넘지 못하는 내게 종종 그런 말을 했다.
“취업하면 인생이 바뀌어.”
그 말을 들을 때 나는 정말 조롱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 말은 적기에 내로라하는 회사에 입사한 사람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미 많은 게 뒤틀려버려서,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사람의 입장에선,
취업은 보수공사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왈가왈부해 봐야 폼만 빠질 것 같았다. 대신 속으로 그게 진짜인지 확인해 봐야겠다, 그렇게 결심했었다. 그때는 5인 미만 회사를 힘겹게 다니고 있었던 터라 그 말이 사실이길 내심 바라었다. 그런데 그 신비하고 마법 같은 말처럼 뭔가 확실히 바뀌기는 바뀌었다.
우선, 합격 통보를 받고 난 다음 날 아침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마치 기지개를 쭉 편 것처럼 가뿐했다. 원하던 바를 이뤄냈다는 성취감이 들었고, 없는 집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평생(?) 소득원이 생겼다는 사실이 난생처음 겪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입사일 전까지 뭔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은 앞섰지만, 바라던 대로 바르셀로나나 융프라우를 보러 갈 수는 없었다. 수중에 땡전 한 푼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 분위기도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을 이제야 한 딸이 뭐 그리 기특하겠는가.
그래도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 지난한 시간을 이겨낸 나를 격려하고 싶었다. 짐을 챙겨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순천만을 가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10년 전, 순천만에서 이집트인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국제교류프로그램 차 한국을 방문한 이집트 청년들은 내 또래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외모나 분위기가 강렬했다. 자유 분방한 헤어 스타일과 단단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무슨 말도 무뚝뚝하게 하는 그들을 보면, DNA가 조금도 겹치지 않는 완전히 다른 인종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자신들이 태어난 황량하고 건조한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건조한 분위기를 풍겨대던 그들은 사방이 습지로 둘러싸인 순천만 위를 부지런히 걸었다. 이건 너무하다 싶을 만큼, 지독한 습기가 옷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슬쩍슬쩍 그들의 눈치를 보며 걸었다. 마침내 전망대에 도달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피처럼 붉게 물들어있었다. 수평선까지 뻗어나갈 것처럼 드넓게 펼쳐진 습지는 동그란 구형으로 군락을 이룬 초록빛 갈대, 그 주변을 감싼 붉은 칠면초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 현실적이지 않은 장면이었다. 아마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장면일 거라, 그렇게 생각했었다.
구경을 마치고 저녁을 먹은 후에 카이로 청년들과 간단히 작별인사를 하였다. 하루종일 데면데면했던 그들은 떨이(?) 처리하듯이 기념품을 한가득 안겨주었다. 키링이었다.
“파피루스 종이야.”
여자애가 선물을 주면서 유창한 영어로 설명을 덧붙였다. 파피루스에는 파라오가 그려져 있었다. 그 파피루스 키링은 마치 아낙수나문이라도 소환할 것처럼 께름칙하게 느껴졌다. 떨떠름하게 작별을 하고 그날을 아주 잊어버렸는데. 며칠쯤 지났을까, 담당코디네이터로부터 연락이 왔다. 카이로 청년들이 가장 좋았던 곳으로 순천만을 꼽았다는 것이었다.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았는데, 의외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 역시, 종종 그 붉은빛으로 물든 바다가 떠올랐고,
순천에 가봐야지, 가고 싶다, 되뇌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10년이 지나, 당장에 어딘가로 가야겠다는 결심이 든 순간, 순천이 생각났다. 한참을 달려 순천 버스터미널에 다 와가자, 갑작스레 기시감이 들었다. 조그마한 버스 정류장과 익숙한 정경. 내가 최근에 이곳에 온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도통 어떤 이유에서 이곳을 왔는지 알 수 없다.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순천만으로 가는 시내버스로 갈아타고서도 한참을 순천에 온 이유를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결국 생각을 멈추려고 애를 써야 했다.
시내버스는 홈플러스, 순천역이 위치한 조그마한 도심을 지나쳐 논밭을 달리더니 순천만 입구에서 멈춰 섰다. 6월 말의 순천만에는 습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침내 전망대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모여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와 가까워지는 동시에 광활한 대지와 바다가 펼쳐졌다. 그런데, 흐린 하늘과 광활한 바다는 그날과 비슷했는데 그것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풍경은 십 년 전 그날과는 많이 달랐다.
황량했다, 습지인데도 마치 사막처럼 황량했다. 오히려 사막이 더 생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갈대 군락은 칙칙했고, 칠면초는 보이지 않았다. 몇 번 포즈를 지어 사진을 찍다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조금 허탈하였다. 뭔가 아주 잘못 기억하는 건 아닌지, 그 붉은 칠면초들도 상상은 아닌 건지 싶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많은 시간이 충분히 흘러, 기억도, 생태계도, 많은 게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뭔가를 놓친 걸까, 싶은 답답한 마음을 안고 집에 다 와갈 때쯤, 순천에 왔었던 이유가 떠올랐다.
기사시험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시험을 치른 것이 2년 전이었다. 어이없게도 그날을 ‘최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벼르던 순천을 왔었는데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렇다면, 기억은 왜 이리 깨끗이 지워지게 되었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게는 뭐든 다음으로 미루는 습관이 있다. 초밥을 예로 들면, 광어, 참치, 연어 순으로 먹다가 가장 좋아하는 생새우초밥은 맨 마지막에 먹는다. 그러면 이미 배가 가득 차서 처음 먹었던 광어 초밥보다 감동은 적어진다. 하지만 별수 없다. 가장 맛있는 걸 맨 처음 먹어버릴 수는 없으니까. 그 습관은 행복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취업이 우선순위 정점에 위치한 이후로는 그 밖의 것들은 중요치 않게 되었다.
‘내가 지금 추억팔이할 때가 아니지.’
‘친구 만날 때가 아니지.’
‘가족 여행 할 때가 아니지.’
그리고 놀랍게도 대부분의 일들을 ‘중요치 않은 일’들로 분류하여 기억에서 깨끗이 흘려보내었다. 그 짓을 한참을 하니 결국 2년 전 순천에 왔었던 걸 최근으로 기억할 만큼 마음의 기억능력이 형편없어졌고, 내가 만든 적기에 다시 찾은 순천만은, 미뤄둔 기대감을 채울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하, 정말 내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뭐,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합격 후 성취감은 미약했다. 그마저도 일주일을 채 못 갔다. 최고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 미뤄놓은 욕구들은 빼짝 말라버렸는데, 최고의 행복감이 얼마나 오래가겠는가. 마치 배가 이미 다 부르고 난 후에 생새우초밥을 먹은 것처럼. 합격은 내게 큰 의미나 감동을 줄 수 없었다.
‘취업하고 나면 인생이 바뀌어.’라는 친구의 그 말은 다른 의미로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오랜 취업기간 동안 미뤄놨던 감정들을 다시 마주하고 이해하고 화해하는 그 청산과정이 공부하는 과정보다 더 힘들다는 것은, 취업이라는 지점을 지나고 나서야만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조금씩 기억을 채워나가고, 행복을 다음으로 미루는 짓은 하지 않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