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내 나이였을 때,
내 엄마는 이미 엄마였다.
내 기억 속 엄마는 언제나 어른이었고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던 어린 나는 열심히 엄마의 흔적을 쫓았다.
키가 자라고 눈이 커질수록 엄마가 아닌 다른 세상이 눈에 들어왔고 온 세상이었던 엄마는 어느덧 따분하고 고리타분한 옛날의 사람으로 밀려났다.
우리는 종종 생각이 달라 다투었고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 서로를 향해 핏대를 세웠다. 어떻게 너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려고 하느냐는 엄마의 말에 엄마처럼 억척스럽게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로 엄마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 억척스러움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고, 주제넘게도.
그러다 누구에게나 그 시기가 찾아오듯 내게도 내가 태어나던 날 엄마의 나이를 넘겨버리는 시점이 찾아왔고 그제야 내가 감히 주제넘었음을, 나는 변화에 민감하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깨어있는 사람이라 자부하며 곧추세운 목대를 하고 의견이라는 명목 하에 엄마에게 내었던 큰 소리가 그 어느 말보다도 엄마를 상처입힌 말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깨닫지 못하는 새 어른이 되었고, 다 자라버린 내 모습은 어릴적 생각하던 어른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제멋대로에, 무언가를 책임지기에는 한참 어리고, 세상에 짓밟히며, 감정적이고 유치하게 굴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나보다도 어렸던 엄마는 어떻게 나라는 책임을 오롯이 떠안았을까. 지금의 나보다도 어렸던 나이에 밑창이 다 떨어져가는 신발을 해가 바뀌도록 신으면서 자식의 입에 맛난 것을 넣어주는 것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 했던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거지?
세월이 가면 키가 자라듯 자연히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나도 엄마처럼 어엿한 어른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결국 내 시간은 째깍대는 초시계소리에 나를 끼워맞추는 과정이었고, 맞지도 않은 옷을 억지로 껴 입은 채 그간 맞이한 아침의 횟수만큼은 어른처럼 굴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근하는 날들이었다.
엄마의 성숙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엄마는 말했다. 자식이 생기면 다 그런 거라고. 나만 바라보는, 책임질 어린 것이 생기면 엄마는 다 되는 거라고.
엄마의 세월은 그렇게 응어리져 다 내게로 왔다보다. 미처 흘려보내지 못한 엄마의 어리광이 내게로 와, 지금의 나는 이렇게나 유치하게 구는가보다.
엄마는 "유치하게 사는 삶이 좋은거야." 하고 말했다. 그러나 엄마에게 삶의 힘겨움과 책임의 무게를 오롯이 떠안긴 내가 유치하게 사는 것이 과연 좋다고 할 수 있나. 엄마의 시간들에는 분명 나의 책임도 있을텐데. 나이는 책임감의 무게라고 하는데 그 책임감을 엄마 혼자만 떠안고 가는 건 좀 불공평하다.
내가 어른이 되는 시점은 언제일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제멋대로인 나는 언제쯤 어른이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