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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와 담배 Jan 13. 2021

  그 그림은 나였다 <불면증과 트라우마>

아르떼미시아 젠띨레스끼( Artemisia Gentileschi )


강력한 과거에 나를 밀어 넣고 그곳에 안락한다. 그곳에서 내가 울고 있고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고 있어도 그것이 가장 덜 고통스럽다. 인간의 뇌는 정말 아름답다고 처음으로 느꼈을 때 나는 왜 과거에 무섭게 갇히려는가를 느꼈을 때고 그 이유를 알았을 때이다. 잠이 오지 않는, 잠을 자야 해결되는 그리고 모두가 잠을 자는 지금이 무섭다. 과거를 마주하되 진실일 필요 없으며 그것은 가치도 없다. 만들어진 기억이라도 그럴듯해진 과거를 만들수록 지긋지긋한 현재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나를 흡입하고 내가 나를 먹는다. 희망은 당연히 없다. 그저 그것이 현명하다고 느낄 뿐이다

오늘도 반복이다.  새벽 3시. 일단 누워본다. 천장의 캔버스가 펼쳐진다. 오늘은 어느 색채 없는 과거를 그릴까. 유튜브에서 겨울 노래를 검색한다. 조명을 최대한 내리고 잔잔한 볼륨을 맞춘다. 오늘은 초등학생의 아이로 돌아간다. 학교에 갔다 와 아무도 없는 집에서 과자 몇 봉지와 비디오 2개로 외로움을 달래는 아이. 그 아이는 비디오를 보다 낮잠에 들었고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이미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고 앞에 문이 있지만 나가기 무서웠다. 10분이 지났을까. 앰뷸런스 소리와 함께 집 대문에서 여러 명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낯선 이들의 급한 발자국 소리에 오히려 안심이 됐는지 그제야 문을 박차고 나가본다. 피가 머리에서 터져 나오고 휴지로 감싸고 있는 어머니. 떨어져 있는 묵직한 유리 재떨이가 강력한 피사체다. 심장이 뛴다. 이렇게 잠은 멀어지고 다시 천장이 보인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다. 그림 하나가 떠오른다. 힘차게 칼로 목을 베는 여성.  옆에서 강하게 남성의 몸을 짓누르는 하인 그리고 뿜어져 나오는 피. 노래를 끄고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를 검색해본다.


홀로페르네스 장군의 목을 베는 유디트, 1620

             

나는 언제나 이 그림이 좋았던 건 사실이지만 왜 지금 이 불면의 밤에 다시금 너무나 보고 싶은 것일까. 적군 장군과 술을 마시며 유혹하여 목을 베는 유디트는 자신의 나라를 구한 여성 영웅이다. 우피치 미술관에 가면 압도적인 디테일에 빠져 들곤 했다. 아름다운 팔지과 소매는 피에 묻을까 최대한 젖혀 올렸고 그녀의 하체는 장군의 가슴 위를 짓누르며 유디트의 몸 반대편으로 밀고 있다. 그와 동시에 머리카락과 늘어진 피부를 꽉 잡은 손은 머리가 움직이지 못하게 힘차게 침대 아래로 고정시킨다. 마침내 목으로 칼이 관통한다. 수직으로 내리꽂는 칼이 아닌, 수평의 방향으로 목을 베며 머리를 밀어낸다. 피가 터지는 곳을 보면 칼이 어디서부터 베이는지 알 수 있다. 그녀의 몸에서 바깥쪽으로. 그녀의 표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고 오히려 약간의 웃음기가 느껴진다. 침대 가장자리에서 꺾이는 장군의 목과 얼굴이 더 드라마틱해진다.


그 더러운 피를 묻히지 않겠다는 유디트의 결연한 의지가 보이지만 킬러가 깔끔한 암살에 실패한 후 투덜대며 초연하게 피를 닦는 모습과 디졸브 되며 나도 모르게 웃음 지었던 적이 있다. 유디트는 장군에게서 멀어지고 싶어 하지만 두려움은 없다. 칼에서 터져 나온 피도 힘을 잃고 침대 천의 결을 따라 순리로써 흘러가는 피는 오히려 더 웅장하다. 그렇게 피는 처음 보는 세상에 뿜어져 나와 사람의 몸이 아닌 세상의 순리를 따른다. 결국 다를 것 없이 침대의 결을 찾아 흘러간다. 격정 후의 평안.

그녀의 그림을 이야기할 때 모두가 얘기하는 것이 그녀의 트라우마이다. 자신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화가 AGOSTINO TASSI에게 그림을 배웠지만 결국 배신을 배웠다. 그는 그녀를 겁탈했고 그녀는 강간당했다. 그리고 그녀는 1611년에 그 고통을 정확히 기록했다


«Serrò la camera a chiave e dopo serrata mi buttò su la sponda del letto dandomi con una mano sul petto, mi mise un ginocchio fra le cosce ch’io non potessi serrarle et alzatomi li panni, che ci fece grandissima fatiga per alzarmeli, mi mise una mano con un fazzoletto alla gola et alla bocca acciò non gridassi e le mani quali prima mi teneva con l’altra mano mi le lasciò, havendo esso prima messo tutti doi li ginocchi tra le mie gambe et appuntendomi il membro alla natura cominciò a spingere e lo mise dentro. E li sgraffignai il viso e li strappai li capelli et avanti che lo mettesse dentro anco gli detti una stretta al membro che gli ne levai anco un pezzo di carne»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를 침대 가장자리로 던지고 나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허벅지 사이로 무릎을 넣어 걸었고 허벅지를 조일수 없게 했다. 그리곤 나의 옷을 올렸다. 내가 소리 지르지 못하게 한 손의 손수건으로 나의 목을 조이고 그다음으로 나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그는 성기를 내 안에 넣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잡아 뜯었고 나에게 넣기 전에 그의 성기를 꽉 잡아 빼내었다.>>


나는 잠 못 이루는 저녁, 처음으로 그녀의 기록을 읽어보았다.

그녀의 글은 그림과 너무 닮아있다.


그녀의 그림은 이렇게 보이기 시작했다.

장군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유디트. 칼의 손잡이는 남성의 성기와 닮아있다. 유디트는 그것을 꽉 쥐고 있다. 그 칼은 유디트 자신의 몸 쪽으로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가 Agostino Tassi의 성기를 잡아 뺏듯이 칼은 그녀의 몸에서 멀어지며 목을 베어 나간다. 장군의 비명 소리는 그림에서 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눈은 현실의 것을 직시하고 있는 눈이다. 정확히 목젖을 보고 베는 걸까. 입에 손수건이 물린 그녀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무서운 순간에 대한 복수인가. 오므리지 못하는 벌어져 있는 장군의 다리는 위엄 따윈 없으며 죽음 앞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초라한 모습의 개구리 자세이다. 빨간 벨벳 이불은 죽음을 강조하고 그를 조롱한다. 손으로 만져지는 듯한 촉감. 부드럽고 강렬하고 계속 만지고 싶은 천이지만 그것은 쾌락일 것이고 그 쾌락을 위해 자신을 희생양 삼았던 스승의 더러움이다. Agostino Tassi가 무릎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걸어 조일 수 없게 만든 것처럼 장군 또한 손을 목으로 오므리지 못하고 하인의 손과 얽혀 제압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목에 들어오는 칼에 손도 대지 못한 채 그녀가 침대에 내동댕이 쳐졌던 것처럼 장군 또한 침대 가장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그녀는 트라우마를 그린 것일까. 잠 못 이루는 저녁 현재가 너무 괴로워 내가 과거로 돌아가듯이 그녀 또한 잠 못 이루고 자신의 과거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던 것일까. 그림의 배경의 어둠에서 나의 불면증과 그녀의 불면증이 오버랩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트라우마에 끊임없이 나를 밀어 넣지만 고통스러운 순간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다시 현재로 빨려 돌아온다.

마주하지 못하고 심장이 뛰는 순간 현실로 돌아오고 트라우마는 하나의 괴물이 되고 계속 자라난다. 그렇게  더 무서운 존재가 된다. 하지만 그녀는 정확히 마주하고 있다. 그녀는 그 괴물을 죽이고 있고 유디트의 노란 옷은 그녀의 희망을 말하고 있다.  그녀가 보고 싶어 자화상을 검색해본다.

알렉산드리아의 카테리나 성녀, 아르떼 미시아 젠띨레스끼,1614-16


성녀를 그린 것이지만 지신의 얼굴을 그렸다. 톱니바퀴를 잡고 있다. 홀로페르네스 장군의 칼을 꽉 쥐던 유디트의 손, 강간당하던 순간에 그의 성기를 빼냈던 분노의 그녀의 손이 아니다. 한 손은 차가운 쉿 덩어리를 지긋이 잡고 있고 다른 한 손은 숭고함의 상징인 야자수 잎을 든 채 옷을 여미며 가슴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그녀는 주위에 존재하는 수평적 세상을 보지 않고 하늘 어딘가를 응시한다. 카테리나 성녀는 기독교 박해시절 톱니 바뀌로 고문을 당하고 꽃다운 나이 18살에 순교한다. 그리고 아르떼미시아는 18살에 강간을 겪게 되고 재판의 과정에서 쇠 덩어리로 처녀막 검사를 받게 되는 수모를 겪으며 더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 모든 고통과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희망을 얘기하듯 톱니바퀴를 지긋히 잡은 손은 그녀의 몸에 들어왔던 쇳덩어리 따위는 나의 영혼을 헤치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빠르게 명성을 떨쳐가고 영국까지 진출했다. 트라우마는 완전히 극복된 것일까.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르떼 미시아 젠띨레스끼의 자화상, 1638-39

트라우마는 극복해야 할 대상일까. 끊임없이 옆에 두고 매일매일의 전투에서 이겨야 하는 적일까. 40대의 그녀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여성화가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는 경력을 쌓았다.

아직 그린 것 하나 없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마주하고 있다. 그녀의 캔버스가 나의 천장으로 보인다. 그녀의 눈을 보면 회상에 빠진 모습처럼 보인다. 크게 벌린 두 팔은 간극이 넓다. 한 손은 아래로 한 손은 위를 향한다. 팔레트를 든 손은 거칠고 어두우며 붓을 든 손은 섬세하다. 그녀는 노란색 옷 대신 과거엔 악마의 피부의 색으로 상징되는 죽음의 초록색을 입고 있다. 두 팔 벌림은 살아있음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를 걸치고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이의 간극이다. 그 간극과 여백은 그녀가 채워야 할 캔버스의 세계이다. 그녀의 삶 일 것이다. 내려가 있는 손의 소매는 중력의 강한 힘으로 덮여있고 붓을 든 손은 자신의 의지로 걷어 올렸다. 그녀의 목걸이의 펜던트는 해골 모양으로 초록으로 덮인 아래의 공간을 향한다. 그렇게 그녀는 죽음을 언제나 몸에 지니고 있다.

그녀가 마주한 삶과 나의 잠 못 이루고 바라보는 천장은 얼마나 닮아있고 얼마나 다를까. 해골 펜던트를 목에 걸고 있듯이 죽음을 초연하게 바라보되 항상 치열한 삶을 택하고 바라보며 싸웠던 그녀. 분노보다는 팔레트의 색 중 여전히 자신의 숭고함을 말하기 위해 흰색을 묻히듯 치열하게 세상과 싸워나갔던 그녀를 상상한다. 오늘 저녁은 나의 트라우마를 초연하게 마주하기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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