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니체를 좋아하는가

강자의 철학 뒤에 숨겨진 나의 오만과 의심

by selves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니체와 헤세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들이 나와 비슷해서가 아닐까 하고.

그들과 나의 공통점은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세울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타인보다 조금은 우월하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세상의 약자로 태어나지 않았고 삶의 큰 풍파 없이 강자의 입장에서 무난하게 살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나에게도 굴곡은 있었고 주변의 고통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환경 그 자체가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의 고통은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니체와 나의 사상이 어쩌면 ‘배부른 자들의 사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이라는 것이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된 이후에야 가능한 것이라면 그들과 나의 사유는 구조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니체와 헤세, 그리고 나는 공통적으로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헤세의 작품 속 인물들을 보면 대개 뛰어난 두뇌와 성품을 지녔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존중받고 인정받는다. 헤세 역시 어린 시절 영특했던 아이였다고 한다. 나 또한 또래보다 조금 조숙했고 그로 인해 친구들이 따르거나 어른들이 다소 어려워하는 아이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문장들이 유독 더 깊이 와닿았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런 공명 자체가 ‘나도 남들보다 조금은 낫다’는 은근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이 우월감이 사실은 나의 한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카뮈와 쉽게 공명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사상은 개인보다는 연대, 강자보다는 약자에 더 가까이 서 있다. 그 방향성이 내게는 불편하게 느껴졌고 마음 깊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과연 나의 사유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까?


헤세의 말년 작품인 <유리알 유희>를 읽으며 그 질문은 조금 더 구체화되었다. 야코부스 신부는 자신의 강자로서의 위치를 이용해 안락한 관찰자의 입장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시대의 고난 속으로 들어가 그 무게를 함께 짊어지고 책임진다. 그 대목을 읽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나는 지금 관찰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과거에는 나도 책을 읽고 세상을 관찰하는 관찰자의 입장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관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글로 옮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주 미미하지만 한 단계는 나아간 셈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이 잦아진다.

사유가 깊어지고 사람이 조금이라도 성장한다면 언젠가는 관찰자의 자리를 벗어나 세상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세상에 정답은 없겠지만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나는 인간이라는 범주 안에서 '잘' 살다 가고 싶다. 다만 지금의 '나'에 대한 집중이 자칫 '이기주의'로 흐르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남는다. 니체의 철학이 나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극단으로 몰고 가지 않도록 내가 취할 것과 의심할 것을 부지런히 추려내야겠다. 그리고 언젠가 니체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줄 사상가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균형을 찾으려는 이 노력이 나를 관찰자의 방 밖으로 끌어내 줄 것이라 믿는다. 세상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많이 알고자 애쓰며 적어도 내가 가진 능력과 여유가 나만을 위한 것이 되지 않도록 계속 생각하고, 읽고, 써 내려가려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자원봉사는 정말 자발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