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봉사는 정말 자발적인가

니체가 미국의 자원봉사를 본다면

by selves

미국 사회를 지탱하는 거대한 축 중 하나는 단연 '자원봉사(Volunteer)' 문화다. 타인을 돕는 행위는 숭고하고 공동체를 위해 시간을 내는 모습은 언제나 미덕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것은 정말 자발적인 선택인가 아니면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회적 압력인가?"


니체는 아마도 이 지점을 경계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이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도록 길들여질 때 그 사회는 더 고귀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순응적으로 변한다고 보았다. 그는 강자의 덕목인 '자기 긍정'과 '자기 극복' 대신 약자들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개인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고 연민을 도덕적 의무로 강요하는 기독교적 도덕관을 ‘노예 도덕’이라 비판했다. 물론 오늘날의 자원봉사 문화가 그것과 완전히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잔재에서 자유롭다고 보기도 어렵다.


세상에는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타인의 삶에 관여하며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지금의 문화가 후자를 너무 쉽게 ‘이기적’이거나 ‘공동체 의식이 부족한 사람’으로 분류한다는 데 있다.


아이들의 교육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질적으로 내성적이거나 혼자만의 몰입이 필요한 아이들에게조차 ‘봉사 시간’이라는 동일한 잣대가 적용된다. 대학 입시에 봉사 활동이 필수 조건이 되는 순간 선의는 스펙이 되고 자율은 의무가 된다. 이것은 참된 교육일까 아니면 사회적 순응을 학습시키는 강요일까.


미국의 PTSA(학부모 교사 연합) 활동 역시 비슷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학교를 위해 더 나은 환경을 만든다는 명분 아래 비전문가인 학부모들이 동원된다. 실제로 이 과정에서 상당한 부담과 보이지 않는 압력을 느끼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 특히 전업주부인 엄마들에게 가해지는 기대는 때로 ‘선택’의 영역을 넘어선다.


물론 누군가의 자발적 봉사와 선의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왜 이 역할이 언제나 ‘선택’이 아닌 ‘기대’가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자원봉사가 의무감이나 관계의 압박에 의해 행해질 때 그 순수성은 훼손된다. 봉사를 함으로써 느끼는 것들과 얻는 것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목적이 자녀의 점수나 개인의 이득을 위해 행해지는 봉사라면 그것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방식의 불평등과 불합리를 낳는다.


봉사 집단 내부의 풍경 또한 곱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순수한 마음으로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서 봉사 경험의 많고 적음이 자연스럽게 역할의 위계로 이어지거나 봉사가 언제부터인가 당연히 제공되어야 할 자원처럼 인식되는 순간들도 있다. 이 과정에서 감사의 언어는 줄어들고 돕는 행위는 삶을 고양하는 경험이라기보다 관계 속 위치를 확인하는 장치로 작동하기도 한다.


물론 모든 봉사 현장이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며 서로를 존중하는 아름다운 사례들도 분명 많다. 그러나 봉사가 반복되고 제도화될수록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위계와 역할 고정이 생길 가능성은 분명 존재한다. 선의라는 명분 뒤에 숨은 권력의 작동을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나는 이 지점에서 미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본다. 도움받는 계층과 돕는 계층이 고정되고 ‘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굳어질 때 개인의 가능성과 의지는 오히려 위축된다. 니체가 우려했던 것도 어쩌면 바로 이런 지점이 아니었을까. 연민이 삶을 고양시키는 힘이 아니라 생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도덕으로 작동할 때 개인은 스스로 일어설 기회를 잃는다.


사람들은 남을 돕는 것을 인생의 가장 고상한 목표처럼 말한다. 그러나 니체는 타인을 직접 돕는 것보다 자기 스스로를 극복하고 단단한 인간으로 서는 것이 세상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자립한 개인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가장 강력한 동기와 희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원봉사는 말 그대로 ‘자원’이어야 한다. 누구도 타인의 삶에 구원자가 되라고 요구할 권리는 없다. 봉사하지 않는 삶이 덜 도덕적인 삶은 아니다. 이제는 ‘착한 사람’이라는 도덕적 가면 대신 개인의 성향을 존중하고 각자가 자기 삶에 책임지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보다 합리적인 사회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누군가를 돕기 위해 태어난 도구가 아니라 각자의 삶을 완성해 나가는 독립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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