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나에게 준 불안과 위안
니체는 확실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고 도발적이다.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미학에 대한 관점을 부정하는 지점에서 나는 또 한 번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니체는 ‘사심 없는 직관’의 미학을 비판했다. 전통 미학에서 '사심 없음'이란 관찰자가 자신의 욕망, 의지,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니체는 이를 '거세된 지성'이라고 비판했다. 누군가의 관점이 배제된 인식은 살아있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예술가가 자신에게서 욕망과 의지를 제외한다면 그것은 타인을 위한 예술을 하는 것이고 이는 개성을 죽이고 길들여진 인간이 되게 하는 집단 도덕의 노예가 되는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쇼펜하우어가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술을 ‘일시적인 망각’과 ‘정적’의 수단으로 삼았던 점을 문제 삼았다. 예술을 통해 삶의 의지와 욕망을 느끼는 대신 평온함과 아름다움만을 느낀다면 그 예술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예술 작품 앞에서 고요함이나 평온함을 느끼곤 한다. 명상하는 듯한 안정감, 갈등이 해소되는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니체는 그것을 진실이 아닌 일종의 ‘유혹’이라고 보았다. 너무 달콤하고 안정적이기에 기분은 좋아지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상태는 생명 에너지로부터의 도피에 가깝기 때문이다.
니체에게 예술은 고통을 잊게 하는 ‘진통제’나 ‘마취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삶의 의지를 고양시키고 고통마저 긍정하게 만드는 ‘삶의 위대한 자극제’여야 한다. 삶은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며 예술 또한 그 연장선에 놓여 있다는 것은 그의 철학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미적 체험은 대상 앞에서 나의 에너지가 샘솟고, 지배하고, 창조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는 '생리적인 흥분 상태'다. 그는 인간이 가장 위험해지는 순간은 고통 속에 있을 때가 아니라 아무런 갈등 없는 만족 속에 있을 때라고 말한다. 사심 없는 직관이 주는 고요함은 우리를 편안하게 안주시키지만 동시에 살아 있으려는 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고 보았다.
그래서 니체는 오히려 지극히 주관적이고 사심 가득한 미학을 옹호하며 묻는다.
“이 작품이 나의 생존 의지를 북돋우는가? 나의 힘을 증대시키는가?”
욕구와 의지가 제거된 인간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그의 말이 요즘의 나에게는 유난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인간에게 지나치게 편안하고 안정적인 상태란 어쩌면 죽음을 연습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그의 통찰은 지금 내가 느끼는 불안정함에 묘한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
요즘 나는 굉장히 불안정하다. 내가 과연 옳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 글쓰기라는 행위가 나에게 맞는 것인지,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끊임없이 의문이 든다. 한동안 이 모든 것이 나에게 꼭 맞는 옷처럼 느껴졌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이게 맞나?’라는 질문이 되어 나를 괴롭힌다.
니체의 철학을 받아들이며 겪는 이 혼란은 나만의 삶의 가치관과 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오는 통증처럼 느껴진다. 그의 사유는 분명 나에게 잘 맞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몰아붙이는 느낌,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나를 고립시키는 느낌이 들어 혼란스럽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이 혼란스러움이 타인에게 전해지는 것에 대한 미안함, 아직 정리되지 않은 날것의 생각들을 이렇게 드러내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따라온다.
그런데 오늘 마주한 니체는 그런 나에게 ‘괜찮다’고,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위안이 된다. 창조의 에너지는 도덕적 올바름이나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오직 나 자신의 욕망과 생명력에서 솟구쳐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불안정한 글쓰기 자체가 니체가 말한 예술에 가장 가까운 행위가 아닐까 싶다. 나의 에너지를 분출하고 나의 생각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일. 혼란을 정리하며 나를 찾아가는 과정. 그래서 나는 당분간 이 내적 전쟁 상태를 계속 글로 옮기려고 한다.
이 불안정함이야말로 지금 내가 뜨겁게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