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과 가속도는 물리량이 서로 다른 힘인가? 헷갈릴 때는, '차원해석'을 해보면 알 수가 있다.
'차원해석(dimensional analysis)'이란, 공학이나,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용어 이어서 조금 생소하기는 하지만, 수식으로 나타내어지는 물리량들을 길이(L), 시간(T), 질량(M)…. 등의 '기본차원'으로 분해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면,
길이는 L(1차원), 면적은 L×L(2차원), 부피는 L×L×L(3차원)로 표시된다. 결국은 'L' 하나로 길이, 면적, 부피가 정의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예제를 중력과 가속도에 적용하면, 중력은 길이를 시간의 제곱으로 나눈 것이어서 차원으로 해석하면 L/T×T로 된다. 가속도도 차원으로 해석하면 L/T×T로 표시되어, 결국 중력과 가속도는 같은 물리량임이 분명해졌다. 우리가 가만히 눈을 감고 어두운 방에 있을 때, 중력과 가속도는 같은 느낌으로 느껴진다. 그래도 못 믿겠다면 실험을 해보면 아실 수 있을 것이다. 실험 방법은 각자 연구해 보시도록...
서두가 더 장황해지기 전에 본론을 말씀드리면, 피상적으로 서로 다르다고 알고 있는 현상들이,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요소들로 분해해 보면, 동일한 것들이 비일비재하다.
원효는 6두품 출신이다.
옛날 신라는 인도의 카스트제도 못지않은 계급사회로서, 골품제도로 신분을 나누었다는 개뼈다귀 같은 역사적 사실을,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아예 누워서 취침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원효는 성골이나 진골이 아니어서 사회적으로 성공된 진출을 보장받지 못 한 한 때문에 승려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유추를 해본다. 승려로서 높은 학식을 갖추고자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 도중, 문뜩 깨달음을 느껴 경주로 다시 돌아왔다는 해골물 고사를 안 들어 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어찌 되었든, 당나라행 선박의 지연 도착과 결행 등으로 터미널에서 노숙하던 원효가, 과하게 치러진, 당나라 유학을 빙자한 송별식 덕분에 생긴 갈증으로 해골에 담겨있는 물을 먹은 것이 진리를 깨닫게 하는 발단이 되었다.
특히, 현재의 운송업계도 운영의 한계상, 지연 도착과 결행 등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점에 대해서는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심심한 유감을 표시하는 바이다.
특급 호텔 커피숍의 본차이나(Bone China) 잔에 담긴 아이리쉬 커피(Irish coffee)처럼, 하얗게 빛나는 크림과 위스키가 가미된 향기 나는 커피가 아니라, 해골바가지의 주변을 덮은 구더기와 실지렁이가 헤엄치는 찐득한 물을 마신 원효도 명석한 두뇌를 활용하여, 자신의 경험한 기이한 현상에 대하여 '차원해석'을 통한 진실 규명에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젯밤에 마신 물과 아침에 눈으로 확인한 물과의 차이점을 천재라 알려진 원효 자신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노란 쓸개즙이 올라오도록 토한 후에야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뒤이어 읊었다는 시구가 전해진다.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種種法生)하고,
심멸즉종종법멸(心滅卽種種法滅) 하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구나!
이제 고속버스를 운행한 지 2개월이 지났다.
괴산에서 강남 세트럴시티 터미널까지의 거리는 약 150km 정도 되며, 두 시간여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필자가 몰고 다니던 시골 버스는 길이가 9.5m이지만, 지금 몰고 다니는 고속버스는 12m이다. 2.5m 더 길다. 처음으로 고속버스를 운행하고 약 2주 정도까지는 모든 것이 낯설어 거리도 길고, 운행 시간이 오래 걸리며, 버스 기럭지도 우라지게 길게만 느껴졌었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분해해 보면, 항상 변하지 않는 '기본차원'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도 변하지 않을 것들이라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지금은 변했다.
지금까지 버스 기사가 입에 거품을 물고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기본차원'도 변했다.
아니, 우리의 간사한 마음이 변한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을 것까지도 변하게 한다. 아인슈타인도 공간과 시간, 모두 변한다고 그랬다.
그 길었던 모든 것이 점점 짧아지더니, 소요 시간마저도 짧아지기 시작했다.
내 느낌이 짧아진다는 것이 아니고 진짜로 짧아졌다. 내 마음이 그러하니 실재(實在, reality)가 그렇게 변한 것이다.
어렸을 때 그렇게 크게 보이던 초등학교 운동장이 초라한 시골집 마당만 하게 변한 것은, 내가 커져서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작아진 것이다. 연애 시절 그렇게 귀해 보이고, 잘못 건드리면 깨질까 봐 애지중지하던 아내도 지금은 그냥 내 옆에서 잔소리하는 블루투스 스피커처럼 보이고, 그렇게 위대해 보이고 존경하던 주변 사람들도 나보다 못한 인간으로 보이기도 한다.
터미널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먹었다. 그러다가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았다. "내 마음이 교만해진 탓이다."
불가(佛家)에서 얘기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틀린 말씀이 아님을 내 몸이 느끼는 중이다. 원효가 위대한 스님임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익숙함은 심적으로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지만, 마음의 교만함을 배가시켜 주변의 귀한 것들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만든다.
"과연 나에게 있어서 평생의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 내가 뭘 잊고 살았을까?"
더 늦기 전에 나에게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