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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드랑 Apr 05. 2022

[남미에세이] #4 난데 없이 찾아오는 사랑

페루_리마_Lima (4), <왜 지금 남미?>

Travel Route | 페루 - 칠레 - 볼리비아 - 아르헨티나 - 브라질 |

페루 여행 | 리마 Lima - 와라즈 - 쿠스코


⌜난데 없이 찾아오는 사랑⌟


드디어, 잃어버린 배낭까지 안전하게 되찾고 와라즈로 이동하는 야간 버스 안이었다.


정말 평화롭기 그지없는 야경이었다. 물론, 자물쇠도 없이 짐칸에 넣고 타야했던 우리들의 배낭은 누군가 가져가려면 언제라도 훔쳐버릴 수 있는 나약한 보안상태(?)었지만 어쩔도리가 있나. 한 버스를 타게 된 이 사람들을 믿고 가는 수밖에! 때로는 이렇게 '나도 모르겠다 에라이!' 하는 생각으로 마주한 문제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이득일 때가 있다. 돌아보면 굳이 그렇게 동동거리지 않았어도, 너무나도 안전하게 그 문제의 해결점에 도달하게 되는 경험을 다들 해 보지 않았을까.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보며, 산 등성이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불빛들이 다 무엇인지 몰라도 결국 사람 사는 냄새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 이렇게도 아름다운 빛이 나는 것이겠지 생각했다. 어떤 모양으로 살아가든 인생이라는 건 다 아름답단 말이다.



그렇게 눈을 좀 붙이고 잠을 청하려 했더니, 세상에. 남미가 우리를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우리를 놔둘리가 없었다. 한 밤 중, 야간버스가 옆 차를 피하려다 돌벽에 박았다. 내 인생 최초의 교통사고였다. 한국에서도 경험한 적 없는 교통사고를 여기서 이렇게 경험하다니. 다친 사람은 없었으나 돌벽이 없었으면 버스가 옆으로 구를 뻔했던 아찔한 상황이었다. 2층 버스였고, 나와 남동생은 2층 좌석에 누워있었기 때문에 기울어진 버스 안을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시간은 새벽 3시. 다음 차는 언제 도착한다고? 5시간 뒤에나 온단다. 남미는 서두르는 법이 없는 세상이다. 무엇이든 빨리 빨리 해치워야 하는 한국과는 딴판인 이 세계의 법칙에 우리도 점점 적응해가는 듯 했다.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으니까. 사고 덕에 우리의 배낭들이 굉장히 안전하게 트렁크에 보관될 수 있었으니 '나쁘지 않네' 라고 내뱉었던 건, 남미에서의 몇일 새에 벌써부터 고생스러움의 역치가 낮아졌기 때문이었을까. 남미에 도착한 후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끝도 없이 쏟아지는 말도 안되는 하루하루를 돌파해내며 '힘든 상황'을 규정짓는 기준 자체가 높아질 수 있었던 것은 인생 전체를 통틀어 상당히 유익한 수확이었다. 우리 삶 역시 매일 매일 규정할 수 없는 문제들이 쏟아지는 순간과 순간들의 연속이니까!



그렇게 한 밤중의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새벽의 공기는 차가웠다. 너도 나도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갑자기 어떤 외국인이 일어나 자기가 가지고 있던 과자를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우리가 겪고있는 이 어려운 상황을 조금만 버텨서 함께 이겨내보자고 말이다하나씩, 하나씩. 과자가 전해질수록, 처음엔 어리둥절했고, 그 다음엔 고마움을, 그 다음엔 감동을 느꼈다. 그 작은 선물이 차례차례 우리들의 손에 쥐어지는데, 차가운 새벽 공기로 둘러싸여 있던 그 공간이 놀랍도록 따뜻해지는 기적을 경험했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생각을 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나의 것을 먼저 나눌 수 있는 여유. 나 역시 배낭 속에 동생과 함께 사두었던 초콜릿 한 봉지가 생각났다. 그리고 곧장 동생에게 버스로 들어가 초콜릿 봉지를 건저오라고 시켰다. 나쁜 누나라고 욕하지 마시길. 여행 계획부터 버스 예약, 호텔 예약 모두 내가 했으니 몸으로 부딪히는 건 그 놈이 해도 된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가져온 초콜릿을 우리 역시 일행들에게 하나씩 나누기 시작했다. 힘든 상황 속에서 뭔가를 나눌 수 있다는 기쁨! 과자를 받을 때보다 초콜릿을 나눌 때 배가 되었던 한 밤중의 벅참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처럼 난데없이 발동하는 작은 사랑들이 이어지고 이어지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을 텐데. 우리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순 없을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말이다. 내가 느끼기에는 먼저 움직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한 사람'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를 바라보는 누군가 역시 그와 같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의지와 용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기다리다 지친 우리들은 결국 지나가는 버스 한 대를 잡아 타고야 말았다. 새로운 버스를 탈 때 또 다시 10솔씩 버스비를 내야 했는데,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남미는 그런 것들을 따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 다들 별말 없이 돈을 냈다.) 꼭 이럴 때 현금이 없다! 워낙 소매치기가 심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매 도시를 떠날 때마다 탈탈 현금을 털어버리고 출발했던 우리들이었기에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나와 남동생 둘다 당황해서 어쩔줄 모르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일인가! 또 다른 외국인이 우리들에게 다가와 20솔을 그냥 내줬다. 2파운드밖에 안된다고 털털 웃으면서 말이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이것이 사랑의 선순환이 아닌가! 고마운 마음에 남아있는 초콜릿 한 뭉텅이를 몽땅 털어서 가져다줬다. 사랑이 돌고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넉넉히 상생할 수 있는 놀라운 세상은 동화 속에나 등장하는 유토피아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사랑의 선순환을 당신이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난데없이 찾아오는 사랑, 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2018/6/30/토요일의 기록


한 숨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이 찾아와 있었다. 이렇게 고생 고생을 하며 찾아가게 만드는 곳. 와라즈는 어떤 곳일까. 기대와 설렘, 그리고 막연한 걱정들이 뒤섞인 채로 아침 해가 떠오는 창가의 풍경을 만끽한다.


리마-와라즈 야간 버스의 아침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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