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ph Phelps Vineyards
나는 꽤 단순한 사람이다. 한 번 사고의 노선이 정해져 버리면 그걸 우회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렇다 보니 미 서부 와인에 대한 내 시야는 몇몇의 저렴한 캘리포니아 와인으로 상당히 좁아져 있었는데, 그걸 보란 듯이 부숴버린 게 바로 조셉 펠프스 Joseph Phelp Vineyards의 바커스 Backus 2012였다.
시아버님이 좋은 날 열려고 몇 년 보관하고 계셨던 바커스는 내가 마셔본 그 어떤 나파 와인보다 밸런스가 좋았다. 분명 느껴지는 캐릭터는 여지없는 캘리 까베르네 소비뇽인데, 마치 훌륭한 보르도처럼, 어느 팔레트 하나 모나게 튀는 것 없이 블랙 커런트, 체리, 블랙베리가 부드러운 오크, 바닐라와 어우러져서 긴 Finesse로 이어졌다. 역시, 파리의 심판은 괜히 있었던 게 아니었다. 저렴한 바롤로를 마시고 모든 바롤로를 욕하진 않으면서, 왜 손쉽게 캘리포니아 와인을 가격만 오른 Hype라고 치부해 버렸을까. 그래서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나파 와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으러.
당연히 첫 목적지는 조셉 펠프스였다. 조셉 펠프스는 몬다비와 함께 나파 지역 와인의 가장 큰 개척자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바커스의 생산자였으니까. 욘트빌 Yountville 에서 St.Helena로 넘어가는 길목, 끝없이 포도나무가 심겨있던 언덕들 사이 멋진 로그 캐빈 건물이 우리를 반겼다. 넓은 포도밭을 내려다보는 테라스에 앉아 테이스팅을 진행했는데, 그날 테이스팅에서 우리가 마신 건:
1. Chardonnay 2020, Pastorale Vineyard (Sonoma Coast): 100% chardonnay, 14 개월 숙성 (45% new, 55% 재사용 프렌치 오크)
상당히 샤프하고 crisp. 과실향도 풍부하고 질감도 너무 오일리하지 않아 좋았다. 특히 저렴한 캘리 샤도네이에서 자주 느껴지는 특유의 과한 오크&바닐라 개입이 거의 없었다. 구대륙 같은 느낌이 많이 들어 테이스팅의 첫 코스부터 산뜻하게 놀랐다.
2. Pinot Noir 2021, Pastorale Vineyard: 100% 피노누아, 24% whole cluster fermented and 14 개월 숙성 (45% new, 55% 2년 된 프렌치 오크)
허브 향. 바롤로 같이 가죽 향이 묘하게 올라오고, 질감이 가볍다. 신대륙 피노누아에 여러번 데여와서 큰 기대를 걸지 않았는데, 가죽과 허브향이 잘 어우러지고 투명도도 좋아서 금방 다 마셔버렸다.
3. Vin de Mistral 2021, Central Coast: GSM, 52% syrah, 33% Grenache, 14 % Mourvedre, 1% Viognier from Santa Barbara & Paso Robles, 13개월 숙성 (30% new, 70% 2년 된 프렌치 오크 french oak puncheons)
약간 Gamay 품종 같이 딸기, 당도 높은 베리 계열의 과실향이 지배적이었다. 프랑스 남부 론 지역의 GSM에서 나는 가죽과 이끼, forest floor 향보다는 호주 GSM에서 느껴지는 당도 높은 스타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내 취향과는 조금 멀었다.
4. Cabernet Sauvignon, 2018 Napa Valley: 97% Cabernet Sauvignon, 2% Cabernet Franc, 1% Malbec. 18 개월 숙성 (프렌치 + 아메리칸 오크, 40% 새 배럴, 60% 1~2년 된 배럴)
아직 어린지라 탄닌이 상당히 강했다. 후추의 매운맛이 많이 느껴지고, 과실이 많이 튀었다. 말하자면 Textbook의 Cabernet Sauvignon처럼 베리류가 많이 느껴지고, 숙성 연도에 비해서도 유독 어리다는 느낌을 많이 받은 와인이었다.
5. Insignia, 2019: 93% Cabernet Sauvignon, 5% Petit Verdot, 2% Malbec. 24개월 숙성 (100% 새로운 프렌치 오크)
1년 더 어리지만 블렌드 종류와 빈티지의 영향인지 2018 조셉 펠프스 기본 cabernet sauvignon 보다는 확연히 부드러웠다. 동일하게 후추의 매운맛은 있으나 과실 영향이 조금 더 커서 편안한 느낌이었다. 다만 기본 라인보다 밸런스와 풍미가 좋다고 느낄 뿐, 명성에 비해 와인 자체가 대단히 인상적이진 않았다.
편견이란 내가 안주하기 위해 생겨나고, 그 comfort zone에서 뛰쳐나와 새로운 관점이 생겨날 때 가장 짜릿한 법이다. 처음엔 바커스가 그랬고, 캘리포니아에서 마신 많은 와인들이 그랬다. 이번 여행에선 정말 많은 와인을 맛봤다. 조셉 펠프스, 오퍼스원 Opus One처럼 대형 와이너리 이외에도 키슬러 Kistler, 한국에는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마야카마 Mayakama’s 나 하트포드 Hartford 등, 나파와 소노마, 그리고 그 너머의 캘리포니아의 다양한 지역에서 재배되는 와인들을 마셨다. 그 과정에서 나는 예상치 못하게 훌륭한 와인을 정말 많이 만났다. (차차 글을 써볼 예정이다. 되도록 매주)
조셉펠프스에서 테이스팅할 때엔 까베르네 소비뇽보다 외려 큰 기대가 없던 소노마 샤도네이와 피노누아에서 더 놀랐다. 가장 기본 테이스팅에 나오는, 세미-엔트리급 샤도네이와 피노누아였는데도 구대륙 못지않게 crisp 하고 주질이 높다고 느꼈다. 우리의 테이스팅을 가이드해주던 head wine educator 마이클도 언급하기를, 다들 인시그니아 Insignia나 다른 까베르네 소비뇽 때문에 조셉 펠프스에 오지만, 실상 직원인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 샤도와 피노라고 했다.
펠프스 와이너리 방문 전까지만 해도 나도 당연히 바커스를 사 올 요량이었다. 인시그니아는 구하려면 한국에서도 구할 수 있기도 하고, 조셉 펠프스가 유명한 건 까베르네 소비뇽 기반 와인들이니까. 하지만, 내가 결국 한국에 사온건 조셉 펠프스의 다른 싱글빈야드 샤도네이와 피노누아였다. 한국에서 구할 수 없다는 사실도 크게 작용하긴 했지만, 개인적으론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들보다 샤도네이와 피노누아가 훨씬 입맛에 맞았다. 사실 살 수 있다면 바커스도 구매했겠으나, 바커스를 생산하는 밭이 캘리포니아 대규모 산불 당시 많이 소실되어 이제 판매하기 어려워져 남은 건 병당 900불의 매그넘뿐이라 깔끔히 포기했다. (사실 와서 후회는 했다, 더 살껄)
이번 방문에서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변 경관과 자연스레 융화되는 와이너리 자체였다. 조셉 펠프스 와이너리는 와인을 심기 전 그 지역에 많이 자생하고 있던 레드 우드로 건물을 지었는데, 로그 캐빈 같은 외관이 푸근하면서도 그 안에 수려한 인테리어로 잘 꾸며 놓았다.
건물을 짓는 데 사용된 레드 우드는 캘리포니아 주 정부가 선물한 나무로, 조셉 펠프스가 캘리포니아 레드와인 역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임을 기리기 위해 선물하였다고 한다. 올해 50주년을 맞는 조셉 펠프스는 최근 LVMH에 인수되었으나 다행히 돈만 투자할 뿐, 와인 양조나 비지니스 자체에 대한 터치는 없어 지원을 받아 건물 내부 리노베이션 중이라고 한다.
혹 캘리포니아 와인의 팬이 아니더라도, 캘리 와인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위해 꼭 조셉 펠프스 와이너리 방문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