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E. 아, 중간 자리네.”
열다섯 시간 동안 견뎌야 하는 곤욕스러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좁았었나 싶을 정도로 옆자리와 너무 붙어 자리에 앉아 벨트를 매는 동작조차 크게 할 수 없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닭장같이 좁은 이코노미석이 여행의 시작을 알린다. 화장실을 가려 줄을 기다리는데 내 뒤에 서 있던 사람이 팔을 위로 뻗으며 몸을 풀어댄다. 그녀도 이 긴 시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네이버에서 급히 팔천 원을 주고 주문한 목베개는 좁은 자리 때문에 고개가 숙여져서 무용지물이다.
“Chicken or beef?,” “Beef.”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는 기내식 메뉴에 답한다. 메인 요리로 소고기와 밥 이 나왔고 그 옆으로 약간 덜 익은 당근과 파프리카가 들어간 샐러드, 빵과 버터가 나왔다. 팔을 조금만 움직여도 닿는 옆 사람 팔 때문에 밥 한번 먹는 것도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기내식을 먹고 깜빡 졸았다. 졸린 기운이 가시고 책을 꺼냈다. 열다섯 시간 비행하는 동안 책이 없다면 사뭇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것이다. 언젠가부터 긴 시간을 견뎌야 하는 동안 책이 없으면 불안하다. 좋아하는 책과 밑줄을 그을 수 있는 몽당 연필이면 나는 어디든 혼자가 아닌 채 떠날 수 있다. 여행을 오면 나와 가장 친한 친구는 여행을 떠났던 한 사람의 글이다. 그 모든 떠남에 관한 이야기다. 낯선 세계, 그 시간에 푹 빠지기 위한 준비를 한다. 잠시 다른 사람의 기억을 빌려 그곳으로 간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고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곳도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닿을 수 있다. 나는 스페인에 있는 라스 알푸하라스와 아일랜드 위클로 웨이 그리고 내가 곧 가게 될 프랑스 파리에 다녀왔다.
다시 파리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면 그 사람을 생각하고 관찰하는 것처럼 나는 파리가 더욱 궁금했다. 파리행 비행기에서 나는 한 번쯤 파리의 민낯을 보기를 기대했다. 튈르리 공원 속 초록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 속 장면을 그렸다. 그리면 그릴수록 선명해졌다. 그 장면들을 내 눈으로 보아야만 했다. 직접 가야 했다. 기내식을 먹고 잠을 자고 책을 읽다가 다시 잠이 들고 못 견디게 허리가 아파 올 때 샤를드 공항에 착륙한다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늦은 밤, 에어비앤비 숙소로 가는 길에 비가 내렸다. 하도 오지 않는 나에게 “Is everything okay?”,라며 연락해 준 호스트에게 왠지 믿음이 갔다. “Don t worry. I’ll go there.”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급해졌다. 안경에 김이 서리고 앞도 잘 보이지 않아 어두운 밤공기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바람은 뼈가 시리도록 세게 불었다. '46 46. 46.'. 나는 입으로 중얼거리며 숫자를 찾았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 사이에서 주소 앞자리 번호를 보고 숙소를 겨우 찾아냈다. 호스트가 알려준 도어 코드를 누른 후 안으로 들어서자 중문이 하나 더 보였고 어두운 곳에서 문을 더듬으며 열자 좁은 나선형 계단이 보였다. 오우, 엘리베이터가 없는 맨 꼭대기 6층이 오늘 내가 묵을 숙소다. 내 몸만 한 캐리어를 들고 낑낑거리며 올라갔다. 계단은 가파른 계단이어서 발을 잘 못 디디면 끝없이 굴러 떨어져 내려갈 것 같았다. 호흡을 고르고 겨우 올라온 맨 꼭대기층 오른쪽 끝에 문이 열려있었고 거기서 호스트인 아멜은 나를 반겨주었다. 검정고양이와 함께.
숙소는 오래된 건물로 나무 바닥은 밟으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끼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일인용 침대로 개조한 소파가 놓여있었고 소파 맞은편에는 나무로 된 탁자와 그 위에 거실 전체를 환하게 밝혀주는 오래된 스탠드 갓등이 있었다. 다락방 천장에 창문이 나 있어서 하늘에 맞닿아있는 기분이었다. 오른쪽 한편 작은 주방에는 온갖 스파이시 향신료와 엑스트라 버진 오일, 간단하게 먹을 아침 식사를 위해 곡물빵과 초콜릿 시리얼 그리고 냉장고에는 밤잼과 땅콩잼을 비롯해 우유를 준비해 놓았다. 내가 캐리어를 펼치자마자 에일리(고양이 이름)는 폭신한 내 옷 위에 자리를 잡고 나를 올려다봤다. 대형 거울로 거실이 모두 비출 만큼 좁은 곳이었지만 오래되고 낡은 이곳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