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히 열린 공간

by 채진아

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의 잠 속으로 그냥 이유 없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애쓰고 분투하는 창작자의 꿈속으로 필연적인 목적을 가지고 들어온다. 들어와서 그 수고로부터 무언가를 끌어올린다. 불러일으킨다._이승우, <고요한 읽기>


“너 남자 친구 이름이 박지훈이라고 그랬나?”

“너 기억력 안 좋은데 어떻게 그걸 기억해?”

“내가 다 기억하지. 중요한 건 기억 못 해도 내가 기억하고 싶은 건 기억해.”

사실 나는 친구의 남자 친구 이름을 기억한 게 아니다. 적어두었다. 내 수첩 한구석 '기억의 저장소'라고 하는 곳에. 거기에는 그때 만난 친구 말고도 또 다른 친구의 정보가 적혀있다. ‘언니는 천안에 살고 조카는 두 살. 언니랑 다섯 살 차이 남. 군만두를 안 좋아하고 찐만두를 좋아함.’ 기억력이 너무도 나쁜 내가 친구들의 신상을 기억하려 노력하는 메모다. 이렇게라도 안 해두면 나중에 만나 얘기를 나눌 때 이 정도로 기억을 못 하나 싶은 민망한 상황이 친구와 나 사이에 벌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친구를 만나기 5분 전 나는 내 수첩을 슬쩍 본다. 공부도 이런 공부가 없다. 기억을 원체 못하는 나를 친구들은 너무나 잘 간파하고 있다. 응 어차피, 지금 말해도 야채는 기억 못 해. 이런 소리를 듣는 내가 적으려 애쓴다. 친구에 대해, 가족에 대해 그런 사소한 것들부터 내 메모는 시작되었다.

기억의 저장소 역할을 해주는 메모 말고도 메모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건 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이다. 메모하는 순간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가 해주었던 말이 수없이 나를 스쳐 갔음을. 쓰고 기록하는 삶을 왜 이제야 시작했을까. 그때 네가 내게 해주었던 말을 남겨 두었더라면 그리고 지금 다시 그걸 읽어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마음에 담아 두고 싶었던 말은 그 시간을 벗어나기만 해도 쉽게 잊혔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그때 걔가 나한테 해줬던 말이 뭐였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 말을 부여잡고 떠올리지 못하는 나를 책망했다. 대화하는 도중에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순간순간을 낚아채야 했다. 그것은 손으로 정성 들여 쓰고픈 말이었다. 휘발되어 날아가는 말이 아닌 오래 간직하고 싶은 말에는 뭔가 다른 노트가 필요했다. 친구와 점심을 먹고 헤어진 나는 합정 교보문고로 갔다. 노란색의 단단한 겉표지로 되어 있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노트를 골랐다. 내 작은 가방에 쏙 들어갈 수 있는 언제든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크기여야 하니까. 나는 그곳에 나의 날을 메모하고 기록했다. 친구가 내게 해줬던 말, 여행하며 받았던 고마움, 누군가에게 느꼈던 사랑을 기록했다.


너를 만나면 좋아

그때의 나로 돌아가서 좋아

그때의 내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언니, 어제 사진 보다가 우리 스위스에서 그 트륍제 호수인가 노 저은 데.

그립다, 다시 가고 싶어.


고마워, 이름이 뭐야?


그런 것들은 집에 홀로 공상에 잠겨 있을 때보다도 더 새롭다. 새로운 날을 만나면 새로운 말로 메모장을 채울 수 있다. "집에 있으면 똑같은 날이 매일매일 되풀이되죠. 여행을 할 때면 달라요. 매일매일이 선물이에요. 그래서 난 여행을 즐긴답니다. 집에 있으면 모든 게 단조로워요. 하루하루가 그 전날의 거울이지요."라고 말했던 보르헤스의 말처럼 집에 있는 날과 여행하는 날은 다르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가족에게,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내가 가고 싶었던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무수한 사건들이 내게 다가와 만날 때 나는 어느덧 그것과 손을 맞잡고 있다. 그렇게 내가 만났던 모든 순간에 대해 말하고 싶어진다. 온몸으로 느낀 것들, 너를 통해 더 진한 무언가가 되어가는 나를 적는다.


메모장에는 내가 보고 들었던 것, 깊이 생각하고 숙고하여 얻은 것이 들어있다. 그런 것들은 책을 읽을 때 가장 가깝게 만난다. 메모와 가장 친한 친구는 책이다. 나는 메모를 시작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구체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막연하게 글을 쓰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그때의 나는 내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어두운 방 안에서 틈새를 비집고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따뜻하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때는 너무 희미해서 알아보지 못했다. 나타나기도 사라지기도 하는 그 온기를 받아 끄적거리던 것이 일기가 되고 글이 되었다.
쓰다 보니 알았다. 쓴다는 것은 내가 닮고 싶은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나는 계속 내 꿈 가까이로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됐다. 매달리고 찾아가고 헤매니까 미래의 내가 되고 싶은 어떤 한 사람을 만났다. 길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더욱 쓰고 싶었고 더 많이 읽고 싶었다. 읽은 책은 내게 말을 건다. 모두 각자 말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내게 한 가지만을 전달하고 있었다. '너는 너일 수 있어', '네가 지키고 싶은 일을 해'. 책을 계속 읽고 있으면 내 이야기가 떠오르고 나만의 것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수동적으로 책을 읽지 않는다. 책은 나를 능동적으로 바꾼다. 내 이야기를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문장을 만날 때 나는 펜을 든다. 나는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인가? 내 안의 내가 묻는다.

그렇게 적은 메모 중에서도 내가 애틋하게 들여다보고픈 단어가 있다. ‘뜻밖의 일’, '호기심', '만남', ‘여행’, ‘끝까지’, ‘내가 해내야 하는 일’'. 내가 메모장에 적어놓은 단어는 내가 살아 내고 싶은 세상에 대한 약속이 담겨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느냐는 내가 비축해 둔 단어의 가치만큼 달라진다. 발걸음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그다음 단어를 채운다. 채워지는 메모는 각자의 자리에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단단하게 고집을 부린 채 박혀있다. 단어 위에 단어가 포개지면서 그 의미를 더욱 단단하게 다진다. 때론 엉망진창으로 쓰인 단어임에도 나는 내가 쓴 메모가 좋다. 시작은 있지만 끝은 알 수 없는 한 없이 넓은 공간에서 여전히 나는 원하는 단어를 찾아 헤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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