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좋아하는 시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안희연 작가님의 시이고요.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달은 다르면서도 같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달을 찾으려면 밤의 한가운데로 가야 한다는 내게
너는 바다에서만 헤엄칠 수 있는 건 아니라 했고
모든 얼굴에서 성급히 악인을 보는 내게
사랑은 비 온 날 저녁의 풀 냄새 같은 거겠지 말했다
끝입니다
나는 힘껏 박수를 쳤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녀가 다시 내 눈앞에 있다. 작가님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이 주일 전 홍대에서 열린 북토크에서 작가님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소수 정원으로 열린 북토크, 여기 영월로 다시 그녀를 만나러 왔다.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차도 없이 거기를 혼자 간다고? 대체 왜?’ 친구가 내게 말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여행처럼 막연하고 뻔뻔한 기대감이 몰려왔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걱정이 아닌 작은 요동 같은 거. 무리하면서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정원 10명’.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홍대에서 사인을 받으며 차마 다 전하지 못했던 얘기를 하고 싶었다.
작가님의 강의가 끝난 후 마지막으로 독자들은 사인을 받고 작가님과 얘기를 나누었다. 나 또한 작가님의 책을 여기 책방에서 산 후 사인을 받았다. 그러곤 작가님이 물었다.
"제가 묵고 있는 숙소가 4인실인데 지금 엄마랑 둘이서 묶고 있어서 두 명 더 재워 줄 수 있거든요."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럼, 저요!"
예상 밖의 일은 이렇듯 불현듯 찾아온다. 오늘 밤 나는 그녀와 함께 잠을 자게 되었다. 서점을 나오니 그녀의 어머님이 마중 나와 있었다. 얼마 전 그녀의 SNS 계정에 올라온 게시물이 생각났다. 어머님이 그녀에게 쓴 편지를 보며 어떤 분일까 궁금했는데 그녀의 가장 가까운 존재를 여기서 만나게 된다니. 빗으로 단정히 빗어 하나로 묶은 머리, 하얀 피부에 맑은 눈동자를 가진 어머니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씩 미소가 나왔다. 생각보다 더 큰 우연, 아니 운명이 내게 일어나서. 우리는 동갑내기였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우리 같이 불멍 해요.” 잠깐이지만 오늘 밤은 그녀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숙소의 이름은 ‘꽃피는 무릉도원’이었다. 도착한 숙소에서 그녀는 파란색 스트라이프 티셔츠와 흰색 반바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내가 씻는 동안 그녀는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를 준비했다. 요리를 하지 못한다는 그녀의 파스타는 내 입맛에 꼭 맞았다. 우리는 장작 난롯불 앞에서 파스타와 맥주를 놓아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요함 속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와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은은하게 둘러싼 조명이 우리 둘만 있는 공간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불멍을 하자고 했건만 옅은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멀리서 완전하게 보였던 작가님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동경과 질투같이 밝은 것들은 그 반대로 어두운 얼굴을 드리우며 피할 수 없는 양면성을 띤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고민을 들어줄 수 있음에 나는 작은 기쁨을 느꼈다. 어떤 한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줄 수 있어서. 용기를 내라고 말해 줄 수 있어서. 누가 뭐래도 글을 쓰는 사람은 아름답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호가든 맥주를 마시며 나는 쉽게 취했다. 때로는 친구처럼 남자친구에 관한 얘기, 취향에 대한 것,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떠들었다. 새벽 두 시 피곤이 몰려와 눈이 감겨 올 때까지 우리는 얘기를 나누었다.
아침에 눈을 떠 바라본 '꽃 피는 무릉도원'은 촉촉하게 비에 젖은 풀 냄새와 함께 진가를 드러냈다. 정원 가운데에 사장님이 직접 심어둔 꽃은 비로 인해 색의 농도가 더욱 짙어졌다. 이런 것까지 다 있네. 사랑채에는 부족함 없는 양념과 조미료를 갖춰둔 주방. 화장실에 세심하게 붙어있는 문구는 숙소에 지내는 사람을 위한 배려가 가득 묻어있었다. 이 여운이 오늘이면 끝나는 게 아쉬워 우산을 들고 산책을 나섰다. 숙소에 나 있는 길을 따라 쭉 걷고 있는데 주차한 차 뒤에서 남자 사장님과 만났다. 숙소 앞 풍광이 운치 있고 예뻐서 자신이 만든 놀이터에서 놀고 있다고 내게 말했다. 사장님 앞에 있는 것은 고작 낡은 테이블이 다였지만.
간단한 산책을 끝내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이번엔 여자 사장님을 만났다. 안채 뒤 텃밭에 상추를 심어놓고 먹고 싶으면 언제든 따서 가져가라고 했다. 이 공간을 만든 부부 사장님이 어떤 사람일지 지레짐작했다. 사장님 부부가 운영하는 곳, 공간을 만드는 사람은 그 공간을 닮아간다.
서울에서 제천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제천에서 주천까지 내달려 히치하이킹을 하며 그녀에게 왔다. 마주한 그녀는 그녀의 엄마 앞에서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얼마 전 느꺼운 마음으로 처음 마주했다면 지금은 너무 가까워 작가와 독자라는 경계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그녀의 벗겨진 민낯을 보는 지경이라니. 허무한 마음마저 드는 기분이라니. 엄마 옆에 있는 작가님은 내가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과 똑같았다. 언젠가 여행하는 길 위에서 이 모습 그대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한 발짝 떨어진 독자의 마음으로 이렇게 그녀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기록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