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발자국

by 채진아

햇살이 가득 비추는 한낮같이 좋은 날,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쉬이 찾아오지 않는다. 집에서 나는 도저히 책을 읽거나 문장을 쓰는 데에 집중할 수 없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보단 누군가를 만나야 할 시간이다.

금요일 오후 한 시, 을지로입구역으로 향한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덥지도 춥지도 않은 바람이 불어와 내 옷자락을 살랑살랑 흔든다. 몸 컨디션을 위해 회사에 길게 휴무를 낸 뇽이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긴다. 얼마 만에 평일 낮 좋은 볕 아래에서 그녀를 만나는 건지. 많은 인파 속에서 나는 눈이 좋지 않아도 멀리서 걸어오는 걸음걸이와 실루엣으로 한눈에 뇽이를 알아본다. 반갑게 인사를 한 뒤 팔짱을 끼고 명동거리를 걷는다. 뇽이와 나는 책을 한 권씩 끼고 있다. 뇽이가 들고 있는 책을 나는 흘끗 쳐다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 내가 들고 온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이다. 뇽이도 내가 읽은 책이 어떤 내용인지 물어본다. 각자 가지고 온 책을 궁금해하고 읽고 있는 책이 좋다면 서로에게 추천도 해준다.


명동 거리는 많은 여행객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골목골목을 빠져나오니 멀리서부터 명동 성당이 보이기 시작한다. 높은 계단을 오르고 정면을 바라보니 중학생처럼 보이는 무리가 명동성당 앞에 모여 있다. 내부를 둘려보려고 했지만 들어가는 입구에 ‘미사 시간’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내부 출입이 되지 않아 우리는 카페에 들렀다가 다시 오기로 했다.

명동성당이 보이는 카페에 들어섰다. 쇼콜라와 로쏘 에이드와 티라미슈를 주문해 놓고 자리를 잡기 위해 테라스로 갔다. 여기는 모든 좌석이 테라스로 되어 있는 그야말로 명동성당을 가장 잘 볼 수 있어 모든 자리가 명당이다. 명동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바깥 테라스 맨 앞줄에 외국인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들을 지켜보며 서울을 구경하러 나온 관광인 기분이 되어본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명당에 앉아 티라미슈를 앞에 두고 얘기를 나눈다. 억새가 찬란하게 빛났던 함께 한 가을 제주를 떠올리며 뇽이가 내게 말한다.

“너랑 일본은 꼭 다시 가고 싶어.”

각자의 가족에 관한 얘기, 남자 친구에 관한 얘기, 그리고 뇽이가 연락이 점점 멀어진 친구에 관해 얘기한다. 내게도 최근 멀어진 친구가 있는지 묻는다. 나는 최근은 아니지만 옛날에 멀어졌던 친구 얘기를 하며 여기까지 온 우리의 우정을 더욱 끈끈하게 조인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그녀를 관찰한다. 수치와 속상함을 모두 털어내는 용기, 낯선 사람보다 가까운 이의 감정을 잘 보살펴 주는 배려, 상대의 좋은 점을 알아보고 그걸 표현해 주는 아량, 대화 속 성의를 표시하는 과한 리액션 같은 것을. 나누는 대화 속에서 나는 그녀의 세밀한 행동을 아주 잘 알게 되었다.

카페는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이기에 90분 제한을 뒀지만 지겨울 때까지 우리는 대화를 나눴다. 이토록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끝내기 아쉬운 사람이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서로 각자 들고 온 책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앞으로 읽고 싶은 책에 관한 얘기를 한다. 우리가 책으로 인해 묶인 사이가 아닌 너무 서로 익히 알고 있는 관계에서 책을 이야기할 수 있어 기쁘다. 얼마 전 연남동 카페에서 그녀가 내게 이슬아 작가의 책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며 추천해 주어 나는 다음날 도서관에서 그 책을 바로 빌려 읽었다. 그녀와 만나면 그 책에 관해 얘기하고 싶어서. 그 책을 좋아하는 그녀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그녀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나는 그녀의 취향을 읽는다.

세 시간여 만에 대화를 끝낸 우리는 카페에서 나와 다시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미사 시간이 끝났을 거로 생각하며 다시 계단을 올랐다. 아까보다 햇빛이 강렬하지 않아 계단을 오르는 게 수월했다. 명동 성당 내부는 가운데 복도로 쭉 이어진 길과 아치형의 높은 천장으로 되어 웅장한 모습을 내뿜었다. 창문으로 스테인드글라스 색을 받아 노랑, 빨강, 파랑, 초록 같은 색색의 빛이 천장과 벽을 비추고 있었다. 성스럽고 조용한 이곳에서 어떤 고귀함이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결혼을 하면 어떨까. 가까운 사람들을 초대해 치르는 아담하고 조용한 결혼식. 사람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숲에 있는 것처럼 주변은 고요했다. 나는 나무 의자에 앉아 조용히 짧은 기도를 했다.

명동성당 바로 앞에 명동 문고가 있어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서점으로 들어가 각자 책을 둘러본다. 우리는 잠시 서로에게 멀어진다. 나는 마음에 드는 제목이나 표지를 보고 책을 뒤척인다. 운이 좋으면 좋은 책을 만날 수도 있겠다.

한참 책방을 둘러보다가 우리는 책을 사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책방을 나오니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돼간다. 이제 집에 가야지 했지만 나는 벌써 그녀가 나와 헤어지기 싫은 걸 눈치챘다. 우리는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 또 다른 카페를 찾아본다. 나는 그녀의 질척임이 싫지 않다. 내가 집에 가고 싶은 척을 하면 그녀는 나를 더욱 놔주지 않는다. 남산이 보이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경치 좋은 카페를 찾다가 구름이에게 연락이 온다. 인제 그만 자기에게 오라는 연락이다. 나는 두 사람의 우정 사이에서 사랑을 갈등한다. 구름이에게 가야 할지 뇽이와 더 있어야 할지. 그러다 좋은 생각이 난건 뇽이를 구름이가 오라는 곳으로 같이 데려가기로 한 것이다. 그냥 저녁이나 편하게 먹고 가.

늘 회사에 치여 힘들어했던 그녀는 나를 밀쳐내느라 바빴는데 몸을 푹 쉬어주니 다시 나를 찾는다. 얼마 전 그녀에게 서운함을 너무 빨리 느꼈던 나를 조금 책망했다. 우리는 다시 팔짱을 끼고 건대입구역으로 향하는 2호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든 자유롭게 거닐 수 있는 서울의 거리가 좋다. 그녀와 함께라면 서울 어디를 가든 좋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서울의 거리를 얼마큼 거닐게 될까. 그녀와 함께 한 발자국이 고스란히 거리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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