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뇌르

by 채진아

아침 여덟 시에 집을 나섰다. 파리의 가을 아침은 쌀쌀했다. 쇼콜라를 마시기 위해 숙소에 걸어서 십 분 정도 거리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따뜻한 초콜릿으로 몸을 녹이고 일요일에만 열리는 근처 재래시장으로 갔다. 수많은 상인이 소리치며 열심히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여기에 살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바스티유 광장에서 시작된 긴 행렬 속 인파로 들어간다. 가판대 위에는 채소와 과일, 치즈, 해산물, 고기가 늘어서 있었다. “와 그루뉴 쎄뀨쎄뀨!” 외치는 아저씨의 발음에서 한국에서 ‘골라, 골라, 아무렇게나 골라’ 같은 똑같은 뉘앙스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쩜 이렇게 사람 사는 건 똑같을까. 재료를 사다가 점심은 숙소에서 해 먹기로 했다. 버섯, 그린 빈, 감자, 적양파, 그리고 애호박을 골랐다. 길게 늘어선 채소 가게와 달리 한두 점포밖에 없는 정육점에 다다랐다. 'Onglet de boeuf'(쇠고기 갈비), 'Escalope de veau'. (송아지 고기 커틀릿), 고기 부위를 써놓은 푯말과 함께 붉은빛을 받은 고기는 더 빨갛고 윤기가 돌았다. 나는 그중 얇게 저민 양고기를 골랐다. 디저트로 블루베리를 사고 스테이크와 함께 먹을 파에야를 샀는데 양이 다 차면 멈추라고 얘기해 줘,라는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해 9유로짜리 파에야는 2인분은 거뜬히 넘어 보였다. 내일 아침에도 먹지 뭐.

종이봉투에 한 아름 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 온 식재료를 식탁 위에 쭉 늘어놓고 먼저 손질할 채소를 골랐다. 감자를 깎고 얇은 적양파 껍질을 한 번 벗긴 후 슬라이스를 시작한다. 우리나라의 연한 애호박과는 달리 짙은 초록빛을 띠는 서양 애호박은 윗둥을 잘라내고 먹기 좋은 크기로 듬성듬성 잘랐다. 감자와 적양파, 애호박을 한꺼번에 볶은 후 스테이크와 잘 어울리는 그린 빈은 한주먹 쥐어 따로 볶았다. 맨 마지막에 고기를 구운다. 마리네이드 된 양고기는 간을 하지 않아도 된다. 프라이팬 위에서 먹음직스럽게 고기가 익어간다. 부엌장에서 손을 뻗으면 겨우 닿는 무겁고 둥근 짙은 다갈색 접시를 꺼냈다. 채소와 고기를 플레이팅 하여 식탁 위에 올려놓고 그 옆으로 블루베리와 마트에서 사 온 요거트, 그리고 레모네이드 스파클링까지 놓아두니 소박하지만 그럴싸한 식탁이 완성됐다. 자리에 앉아 ’잘 먹겠습니다.’를 내게 작게 외치며 포크로 고기를 썰어 한입 베어 먹었다. 입안에서 고기가 살살 녹았다.


파리에서 마음에 드는 가게를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하루 루틴이 생긴다. 구글 지도에 하트로 저장해 둔 베이커리 집으로 들어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레몬 케이크를 사 들고 옆 카페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낸다. 마음에 드는 가게의 조건으로는 큰 도로가 아닌 좁은 골목에 자리 잡아 사람이 많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는 언제고 남아있고 갈 때마다 다른 케이크를 골라 먹을 수 있다. 카페에서는 해가 좋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가을이어도 바깥 테이블에 앉아 커피와 함께 케이크를 먹을 수 있다. 그러면 다른 관광객들과는 달리 현지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해가 지기 전 배가 고파 올 때쯤 다시 나와 거리를 걷는다.


파리가 정말 멋진 점은 아무것도 안 해도 비난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게으름을 일종의 예술로 취급하죠. 그걸 일컫는 이름도 있거든요? 난 '플라뇌르'에요._<에밀리 파리에 가다>


플라뇌르. 산책자, 활보자, 보행자 또는 어슬렁거리는 사람. 파리에서 나는 누구보다 충실하게 이 단어를 이행한다. 사람들 속에 한데 뒤섞이며 사람들이 나를 감싸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정해 놓은 길이 없는 파리를 걷는 이 거리가 좋다. 무언가를 보려 하지도 무언가를 하려 하는 일도 그만둔 채 계속 걷는다. 반짝이는 멋들어진 옷, 선글라스를 낀 채 도도하게 상제 리젤 거리를 걷는 중년 여자, 초록색 베레모와 바지를 깔로 맞춘 할머니. 그들을 보고 있으면 그보다 젊은 나도 눈을 떼지 못한다. 나이가 든다는 숫자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그 멋스러움 때문에 샘이 나서.

오후 5시 6분. 트로카데로 광장에 도착했다. 에펠탑에 불이 켜지는 순간. 와, 소리 없는 작은 환호성이 나온다. 걷느라 지쳐있던 하루, 때로는 혼자임에 외로워 축 처져 있던 어깨가 반짝이는 에펠탑 앞에서 다시금 펴지는 기분을 느낀다. 체크무늬 노란색 돗자리를 챙겨 마트에서 사 온 화이트와인과 납작 복숭아를 사 들고 마르스 광장에서 전철이 끊기기 마지막 시간까지 그와 웃고 떠들며 얘기했는데. 나는 지난여름의 파리를 떠올리며 홀로 있는 외로운 지금의 가을을 위로해 본다. 다시금 여름에 올 날을 기대하며 에펠탑을 한참 바라보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장바구니에 한 아름 담긴 리크를 품에 안고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본다. 하루를 마친 따분한 퇴근길을 함께 걸으며 반복되는 일상의 친밀감 같은 것을 느낀다. 소박한 저녁상에 가족과 둘러앉아 오늘 하루에 대해 얘기할까. 한국에서 지금 엄마, 아빠는 무얼 하고 있을까.

아무리 추워도 바깥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 무단횡단을 일삼고 자동차 도로 옆을 쌩쌩 달리는 자전거. 라탄으로 만든 프렌치 의자와 비닐 천막 아래로 빈틈없이 붙어 있는 테이블. 눈을 마주치면 언제고 봉주르 인사를 건네오는 사람. 상상했던 거리가 내 눈앞에 펼쳐진다. 다시 파리다.

이 거리를 걷는 것이 내게는 단순한 사랑이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나의 비밀이 쌓여간다. 누구나 한 번쯤 품고 있는 평범한 바램. 그건 숨어 있는 사랑을 발견해 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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