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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장군 Dec 14. 2020

폭풍우에 적응하라

뉴질랜드에서 생각을 보내요

해양성 기후

옛날 옛적, 해양성 기후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25년 후, 해양성 기후에 살게 되었다. '비가 잦고, 바람 장애물이 없어 대륙이나 해안에 비하여 풍속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라는 네이버 설명에 딱 부합하는, 이 곳 오클랜드의 날씨.

처음 렌트를 구할 때, '해안가에 위치한 집'에 대한 로망을 품고 바다 바로 앞 집을 보러 갔었다. 비가 오던 그 날, 그 집은 축축 그 자체였다. 습기 가득한 바닷가 공기가 밀려와 곰팡이가 슬 것 같은 그 느낌.. 로망은 산산이 깨졌고, 3번의 겨울을 난 지금 그때 그 집 안 구했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곳의 날씨는 참으로 변화무쌍하다. '오클랜드의 하루에는 사계절이 다 있다'는 말을 이 곳에서 정말 많이 들었다. 아침에 해가 쨍 떴는데 점심에 흐려지더니 30분 후에 비가 들이붓고 2시간 후에는 '호랑이 시집가는'(맑은 하늘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씨가 된다. 어느 정도냐면,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날씨가 일관된 날보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날이 더 흔하다. 계절도 크게 의미 없는 게, 12월 현재 분명 여름인데 점퍼에 부츠 신고 다니는 사람이 흔할 정도로 쌀쌀한 바람이 불고 춥다. 이런 변화무쌍한 날씨에 일기예보도 틀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폭풍우가 치는 겨울

원론적으로 10월 경부터 3-4월 경까지가 이 남반구 나라의 가장 살기 좋은 계절이다. 화창하고 건조해서, 풍경은 그림 같고 태양은 쨍하지만 또 그늘은 서늘하다. 12-2월 여름은 관광객이 가장 많이 오는 기간인데, 보통 반바지 반팔을 입어도 낮에는 덥고, 아침저녁은 또 10도 안팎의 기온으로 꽤 서늘/쌀쌀하다. 해변에서 놀고 자연을 만끽하기에 최적의 날씨다.

그 기간이 아닌, 즉 4-5월부터 9월 경까지의 늦가을에서 겨울은 결코 살기 좋다고 말할 수가 없다(!) 놀랍게도 6-8월 겨울 기간은 많은 키위들도 뉴질랜드를 피해 피지 등으로 도망(?)가 기도 한다. 나 역시 겨울만 있었다면 이 곳 생활을 사랑하는 정도가 훨씬 덜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겨울에 비가 정말 많이 오는데, 1주일을 연달아 맑은 날 없이 비가 오기도 한다. 비 오는 스타일도 대륙성 기후인 서울, 또는 내가 살아봤던 다른 대륙성 기후인 뉴욕과 파리/퐁텐블로와 완전히 다르다. '폭풍우'라는 말에 어울리는, 휘날리는 바람과 함께 들이붓는 비가 온다. 진눈깨비의 비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비슷하다. 너무 흩날리는 비바람이 불어서 우산도 별로 도움이 안 된다. 흐린 검은 하늘에 폭풍우를 일주일 내내 겪다 보면 흐리멍덩해지는 느낌도 든다.

그리고 이 주택가에 폭풍우가 들이닥치면, 열에 세네 번 정도는 정전이 된다. 짧게는 두어 시간, 길게는 2박 3일.. 촛불을 켜고 이웃들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얼른 다시 전기가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강풍에 간판이 휘어져있거나 떨어져 있는 것도 예사다. -15도의 한국 겨울과 비교할 수 없는 온화한(?) 8도 정도의 기온 이건만 히트펌프(Heat Pump)라 불리는 난방기를 켜도 돌집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너무 스산하다.  

몸이 적응한 시간

이 곳에 온 첫 해, 이런 해양성 기후의 겨울은 놀랍고 혹독했다. 처음 오클랜드 땅을 밟은 2월에는, 7월에 얼마나 추울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웠기 때문이다. 4월 말을 기점으로 폭풍우가 점점 잦아지더니, 예의 저 겨울이 왔고, 우리 가족은 모두 아팠다.

바이러스도 한국처럼 맺고 끊음이 분명한(?) 종류가 아니었다. 계속 목이 부어있고 약을 먹고 잠을 자도 잘 낫지 않았다. 한 3주를 그런 바이러스와 살다 겨우 다시 100% 회복되는 느낌에 가까워지면, 다음 가족이 걸리며 차례로 한 3달을 골골댔다.

이런 추위, 이런 겨울에 몸이 적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너무 낯선 스타일의 겨울이었다. 본격 털옷을 입기에는 비교적 높은 기온, 일관성 없이 하루에도 몇 번을 계속 변하는 날씨, 축축하고 으슬으슬한 느낌에 온돌이 간절하지만 있는 건 차디찬 돌바닥 또는 카펫뿐. 5월 말부터 9월 말까지, 꽤나 길게 느껴지는 기간. (게다가 6월 첫째 주 여왕 생일부터 10월 말 노동절 휴일 사이에는 뉴질랜드에 휴가도 없다! 그래서도 가장 혹독한 기간)

이질감에 익숙해지며 - 몸이 기억하는 것

첫해와 비교하면 올해 겨울에는 가족 중 아무도 아프지 않았고, 7-8월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알고 버티는 고통은 첫 해 어리둥절하며 얻어맞던(?) 느낌과는 분명 달랐다. 이제 몸도 해양성 기후 겨울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이리라. 겨울에는 식탁에 뜨거운 국물이 떨어지지 않게 하고, 옷도 늘 여러 겹 쌓아 입어 어떤 날씨 변화에도 그럭저럭 대응하게 되었다.

역시 타국에 살면 몸으로 느껴지는 이질감이 있는 것 같다. 우리 의식에는 사회적인 경험에서 오는 배움이 쌓이는지 몰라도, 그보다 더 강력한 무의식에는, 몸으로 새로운 환경을 살아내는 생활의 느낌이 쌓인다. 날씨, 기후, 공기 그런 것들이 바로 그런 본질적인 것이다. 여기서도 시간을 살 수록, 처음엔 그토록 이질적이었던 계절의 느낌이 조금씩 몸으로 익숙해져 간다.

한국에 돌아가면, 익숙한 겨울의 경험 - 코와 눈이 찡해질 정도로 매서운 추위와 완전 무장하던 추억 - 이 다시 찾아오겠지. 그리고 어느새 이 남반구 해양성 기후에서 살아낸 겨울이 또 몸의 기억에 새겨져 있겠지. 덧붙여 12월 크리스마스가 반바지를 입은 쨍한 여름이었던 기억도. 아직은 언제인지 모를 그 날이 문득 그리워진다.

이런 느낌의 하늘이다. 구름이 겹겹이 쌓여 계속 비를 뿜어댄다.
비가 많으니 무지개도 자주 본다. 이런 게 바로 silverl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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