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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양 Mar 21. 2021

혼자 남은 버스 안, 기사님이 나를 불렀다

“아가씨, 여기로 와봐요”





비가 오니 살 것 같았다.


일주일 내내 미세먼지가 나쁨과 매우 나쁨 수준을 왔다 갔다 했다. 선천적으로 기관지가 좋지 않은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는 나는 환기를 하려 창문을 열어둔 그 10분조차 찝찝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AI 스피커에게 오늘의 날씨와 미세먼지 농도와 운세 따위를 묻는데, 새벽에 내린 비 덕분에 오늘은 미세먼지가 보통 수준이란다. 게다가 밖에서 귀인을 만날지도 모르니 열심히 싸돌아다니라는 답을 들은 터라 오랜만에 외출을 결심했다. (쌓여있던 일거리가 없었다면 안 나갔겠지만...)





카페가 문 닫기 직전까지 창가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맞은편엔 기장을 수선한 정장이 담긴 쇼핑백이 나를 감시 중이었다. 지긋지긋한 이력서. 그다음은 지긋지긋한 과제. 이어지는 필기시험. 사람 뽑는 거 중요한 일인 건 알겠는데, 무려 일곱 단계를 거쳐야 끝이 나는 채용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하고 잠시 삶에 대한 열의가 녹아내린다. 아, 물론 그 회사는 진작 떨어졌다. 역설적이게도 떨어졌기 때문에 오늘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아아, 비가 와서 안 좋은 점 하나는 갑자기 날이 추워졌다는 거다. 그래서 1.2km 불과한 거리를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우리 집은 한적한 버스차고지 앞이라 이 시간에 버스를 타면 그 큰 철덩어리가 실은 얼마나 고요하고 얌전한지 알게 된다. 오늘도 그랬다.





“안녕하세요.”

“예, 어서 오세요.”





나는 버스나 택시를 타면 인사를 한다. 지하철처럼 기관사님 얼굴을 마주할 일이 없다면 모를 일이지만, 버스나 택시를 오를 때 얼굴이 보이고 눈이 마주치는데 인사를 안 하는 게 (나에겐) 더 이상한 일이다. 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신경 쓰진 않지만, 답을 들으면 마음이 더 포실포실해지는 건 있다.




-띡



노트북 가방, 정장이 담긴 쇼핑백, 가는 길에 산 고양이 물건들. 두 손에 나눠 들던 걸 한쪽으로 옮기고 핸드폰을 가져다 댄다. 내리기 좋게 뒷문 바로 앞자리에 앉아 손에 힘을 풀고 창문을 내다본다. 새까맣다. 내 미래인가. 배고프다. 고양이 보고 싶어 등등 두서없이 단편적인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때쯤,





“아가씨!”

“.. 네?”

“여기로 와봐요, 와서 #^@!(%@$!”

“....... 네?”

“와서 카드*+#@%*&”





마스크가 펄럭인다.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말들을 집어삼킨다. 불분명한 소리들. 명확해진 경계들. 두어 번을 더 되묻다가 젊은 놈이 말귀도 못 알아듣는다며 흉보실까 싶어 슬쩍 다가갔다.





“카드가 안찍혔다구요?”

“아니, 카드 찍으시라고요.”

“... 옝?”

“지금 하차 카드 찍고 요 앞에 앉으셔요.”

“.. 으엥?.... 왜요?”




인사를 건네던 차분함은 어디 가고 한 톤, 아니 세 톤이나 높아진 내 목소리에 기사님이 껄껄 웃으셨다. 난, 참, 이럴 때마다 너무 날 것 그대로를 다 보이고 만다.





-띡, 하차입니다.





카드를 찍고 앞문과 가장 가까운 좌석에 앉았다. 기사님의 옆모습이 보이는 자리였다. 사람들이 복작대면 내리는 것도 일인지라 항상 뒷자리를 선호했다. 앞에 앉으니 마주하는 풍경들이 유리를 넘어 내게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앞좌석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나저나, 뒷문 열기 귀찮으셔서 여기 앉으라 그러신 건가..?






“요 아파트 사시죠?”

“네, 맞아요.”

“어차피 버스 돌아가니까, 고 앞에 내려드릴게.”

“엇... 거기까지 가세요?”

“거 아파트 끼고 한 바퀴 도는데, 거기는 아파트 입구라 정류장이 없어요. 허가가 안 난대.”

“아, 그렇구나.”

“춥잖아요, 오늘.”

“와... 감사합니다.”

“춥거나 비 오거나 하면 걸어가기 힘드니까 거기서 세워주기도 해요.”





원칙적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기사님께서도 회사에서 주의를 받아서 이젠 잘 안 세워주신다는데, 양손에 짐을 가득 들고 칼바람 맞으며 걸어갈 내가 안쓰러우셨나 보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인사 담당자가 보낸 불합격, 그 한 마디에 무너지면서도, 처음 뵌 기사님의 한 마디에 그래도 살길 잘했다-하고 박쥐 새끼 마냥 마음을 뒤엎는다. 마스크 너머로 보일만큼 씩 웃었다. 그래.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 잊고 있었지만, 여전히 여긴 친절하고 따뜻한 어른들이 있는 곳이-



근데 한 번 그러니까 어떤 아주머니는 이제 매번 거기까지 가달라 하더라고..”



-었다.. 그리고 아주 빈번하게, 멋지지 않은 어른을 보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아이고... 개인택시가 아닌데...”




동의한단 뜻이었을까, 기사님이 슬쩍 웃으셨다. 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그 유명한 류 배우님의 대사가 떠올랐다. 하여튼 인간이란 참 변덕스럽다. 변덕스러운 인간들이 가득 모인 곳이 세상이니, 그런 세상의 일을 내가 어찌 가늠할까. 그러니까 내일 합격 소식이 들릴지, 아니면 또 불합격 메일이 올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냥, 그 핑계로 또, 내일을 살아보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예~.”





초록색 버스가 멀어지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날이 많이 추웠다. 집에 들어오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1분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고, 무거운 짐을 내려둔 뒤, 손을 씻었다. 불을 켜고, 방바닥에 주저앉아 잠에서 깬 고양이를 어루만지며 AI 스피커를 불렀다.





“아리야, 오늘의 운세.”

“외출을 하는 게 좋겠어요. 밖에서 귀인을 만나게 될지도 몰라요.”





요놈, 돈 값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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