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가족 대화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즉각 답을 하다 말고 백스페이스 키를 연신 눌러댔다. 그리고 언니와의 개인 대화창을 열어 방금 전과 똑같은 문장을 써서 보냈다.
-엄마가 그랬잖아.
고작 일곱 글자가, 아니 사실은 고작 두 글자가, 뭐 그리 아직까지도 불편함으로 가득 차있는지. 아, 그랬어? 언니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난 엄마 하면 떠오르는 것 중에 하나가 그건데. 편두통.
여자는 편두통이 아주 심했다.
나는 종종 그런 여자의 고통을 목격하곤 했다.
몇 살 때였을까. 하교를 하고 버스에서 내리는 그 풍경 속에 언니가 없는 걸 보아하니, 언니가 중학생이 되고 난 후, 그러니까 적어도 내가 열한 살가량 됐을 때인가 보다.
방과 후 활동을 마치면 오후 네시 반. 백 원짜리, 이백 원짜리 불량식품을 파는 장미 슈퍼 앞, 대나무로 엮은 낡은 평상에 앉아 하루 종일 주머니에서 짤랑대던 동전을 꺼낸다. 450원, 정 없이 딱 버스값뿐인 게 괜스레 서럽다. 슈퍼만 들여다보면 불쌍히 여길까 싶어 큰길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버스에서 내린다. 정류장에서 마을까지 이어진 긴 길을 걷는다. 양쪽으로 하얀빛, 분홍빛 연꽃이 빽빽하게 피어오른 걸 보니 한 여름이었나 보다. 골목에 들어간다. 또 들어간다. 그리고 또 들어간다. 삐걱이는 철문을 연다. 도대체 우리 집 대문은 초록색인 걸까 갈색인 걸까. 뭐가 되었건 창피한 건 매한가지였다.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할 말이라 괜히 쾅-하고 문을 닫았다.
화분 밑에 감춰진 열쇠를 주워 문고리에 넣고 돌린다. 어라, 평소와 같은 묵직함이 없다. 다시 열쇠를 화분 밑에 숨겨놓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문을 열자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눅눅한 공기들이 터져 나왔다. 죽어있는 먼지 냄새가 코로 훅하고 밀려들어온다. 공기조차 달아나고 싶어 하는 곳에 살고 있구나. 또다시 현관문을 쾅 닫았다. 신발을 벗고 삐걱이는 마룻바닥을 밟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여자가 침대 위에 잠들어있었다.
애니메이션 속 공주님들처럼 평화롭게잠든 모습은 아니었다. 미디어에서 그려내는 공주처럼 가녀린 몸매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그녀는 늘 자신의 체형에 불만족했고 살 빼는 데 도움이 되는 약(먹는 것이든, 바르는 것이든)을 사들이면서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거울 속 자신에게 비친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했다. 하지만 침대 위에 그녀가 그렇게 잠들어 있는 날이면, 내 눈에 그녀는 여타 공주님들처럼 참으로 연약해 보였다.
그녀가 누워있던 연베이지 침대 프레임과 찡그린 미간과 침대 옆 서랍 위에 올려둔 갈색 테두리 안경과 부스스한 곱슬머리 위로 드리워진 벽지의 무늬. 모순적이게도 이제는 그만 놓고 싶은 그 순간, 그 공간, 그 존재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엄마! 오늘 왜 빨리 왔어?]
처음엔 기뻤다. 그녀의 퇴근 시간은 별달리 정해져 있는 게아니었으니까.특히 여름, 성수기가 되면 자정이 넘도록 야근을 하기도 했다.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함이었을 테다. 그래서 잔업을 희망하는 사람이 있냐는 물음에 늘 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그저 희망한다-,고 답했을지도 모른다.
와락 이불속으로 파고들면 그녀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조용히 좀 해, 머리 아파] 하며 등을 돌렸다. 그러면 바깥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거실 탁자 앞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편두통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어쩌면, 어떤 순간에는 그녀에게 있어 내가 통증 그 자체이지 않았을까 고민하면서.
며칠 후면 26년 전 내가 태어난 날이 된다. 여자가 두 번째 아이를 실제로 마주한날. 그날의 그녀보다 세 살이나 많은 나는 그녀를 위해 소원을 빌기로 했다.
더 이상 그녀에게 통증이 찾아오는 일이 없기를. 자의건 타의건, 더는 희망하지 않는 것에 희망한다고 손 드는 일이 없기를.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사이 가족 대화방은 한의원에 가서 체질검사라도 받아보자는 새어머니의 걱정 어린 문자들로 가득 차있었다.
핸드폰을 내려두고 미용실의 통유리창을 내려다본다. 하필 또 이럴 때, 젊은 엄마와 꼬맹이가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머리칼은 돌돌 말아놓고, 기계 아래서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로 재빨리 떨어지는 눈물을 닦았다. 별꼴이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