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가만 보면 선배는 착한데 까칠해."
오래전 어느 날 밴드 연습을 마치고 뒤풀이 모임에서 학교 여자 후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착한데 까칠하다니. 착함과 까칠함은 같은 문장 안에서 썩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다. 그 여자 후배와의 인연은 오래전 끊어졌지만 후배가 흘리듯 던진 말은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 남았다. 까칠하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다가가기 어려운, 혹은 만만하지 않은 사람. 당시 그 후배에게 확인을 해보지 않았기에 어떤 의미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착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까칠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착하다는 말은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기에 그 후배의 까칠하다는 평가는 신선하기까지 했다. 후배가 지나가듯 던진 그 짧은 한마디가 내가 모르던 나를 직면하는 계기였다. 그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평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착하다는 혹은 착함으로 포장된 선의에 묻혔거나 에둘러서 표현했기에 내가 까칠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모르던 나를 직면하다.
나를 안다는 것은, 내가 모르거나 알고 싶지 않은 나와 직면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의 목소리나 시선으로 알게 되었을 때 편하기보다는 불편함일 때가 많았다. 나도 모르는 나를 직시하게 된 계기가 두 번 있다.
첫 번째는 직장에서 교사연수를 받을 때였다. 가족을 주제로 하는 심리상담 수업이었다. 강의를 듣고 나서 활동지의 원에 가족을 그리는 활동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활동지의 원 안쪽에 가족을 넣었는데, 나는 원 바깥쪽에 모든 가족을 그렸다. 그때 알았다. 나도 몰게 마음 한편에서 가족들을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고 있던 나를 알자 마음이 불편했다.
두 번째는 직장 상사의 권유였다. 그는 내게 '내 마음 보고서'라는 심리 검사를 해볼 것을 권했다. 십만 원이 넘는 심리 검사 비용도 지원해 준다고 했다. 당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나를 위한 권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상사가 권유한 심리 검사를 받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내가 모르고 있던 나를 직면하는 게 불편하고 싫었다. 나를 이해하는 정도는 '착한데 까칠한 사람'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상사의 거듭된 권유로 마지못해 심리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한 달 뒤 얇은 책 한 권 분량의 내 마음 보고서를 받았다.
한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
평소에도 나는 스스로를 '서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아는 지인들도 나의 성향을 그런 뉘앙스로 말하곤 했다. 한그루의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 김인철. 비공식적으로 '착한데 까칠한 사람'이었던 나는 전문가의 심리 상담 분석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한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이었다. 언뜻 보면 완전히 다른 해석이지만 둘 다 나를 표현하는 정체성이었다.
돌아보면 나는 상담을 받고 싶거나 공부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상담을 받았다. 내가 잊고 있던 결핍과, 상처를 직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문제의 원인을 알고 이해하는 과정이었지 근본적인 치료는 아니었다. 나의 결핍과 상처를 안다는 것이 그 상처가 치유되었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착하지만 까칠한 사람이다. 무뚝뚝함은 플러스 알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