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200만 '1인칭 시점'들이 국회앞에서 '윤석열 탄핵'을 외쳤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한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 말의 어원을 찾아보았지만 정확한 출처는 찾지 못했다. 니체의 철학적 사유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가장 높은 정신은 '극한의 고독', '궁극적인 진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추운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바로 실제 하는 추위이자 상징과 은유로서 공간인, 여의도 공원과 국회의사당일 것이다. 12.3내란 사태 이후 여의도 공원과 국회의사당 앞은 칼바람이 부는 실제 하는 추위이면서, 궁극적 진리이자 최고의 이상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지난 12월 14일(토)에도 대한민국의 가장 높은 정신들은 여의도 공원과 국회의사당 앞에 모였다. 이날 탄핵집회에 참여한 인원은 주최 측 추산 200만 명이었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오로지 하나였다. 탄핵. 탄핵. 내란범 윤석열 탄핵. 각 지역에서도 탄핵 집회가 열렸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윤석열 탄핵을 외쳤다.
202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노벨상 시상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덟 살이던 어느 날 하늘에서 쏟아지던 폭우를 어느 건물 처마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20여 명의 아이들을 보며... 중략... 수많은 1인칭 시점을 경험하는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롬 노벨상 시상식-
한강 작가의 말처럼, 윤석열의 내란에 분노한 시민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자신만의 1인칭 시점을 경험하는, 경이로운 순간을 위하여 연일 촛불과 응원봉(탄핵봉)을 들고서 여의도 공원과 국회의사당 앞으로 향했다.
윤석열, 그는 도대체 왜?
윤석열이 저지른 12.3 내란 사태는 그가 말하던 자유와 공정과는 다르게 철저히 자신과 가족만을 위한 사특한 범죄행위였다. 그는 처음부터 공의롭기보다는 자신과 가족만을 위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가 대한민국의 검사이자 검찰총장이자 국가 최고 수반인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이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
윤석열이 저지른 12.3 내란 사태는 2024년 대한민국에서 저마다의 나로서 잘 살고 있던 무수한 1인칭 시점들에게 너무나도 커다란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그동안 우리가 믿고 있던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무참히 파괴했다.
현상이 발생하면 해석이 필요하다. 우선 12월 3일 밤 10시 26분 윤석열이 선언한 비상계엄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12.3 내란사태다. 윤석열이 한밤중에 느닷없이 우리에게 던져버린 이 난폭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현상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결과는 단순하다. 12.3 내란 사태다. 그럼 이 사태의 원인은?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 보면 수많은 원인들이 있다. 윤석열, 최은순, 김건희, 한동훈, 명태균 등이다.
그렇다면 12.3 내란 사태의 가장 큰 원인(주체)는 누구일까? 윤석열? 아니면 김건희일까? 내가 보기엔 윤건희다. 두 사람은 따로 분리할 수가 없다. 윤건희가 12.3 내란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이다. 두 사람은 이 내란 사태의 원인이자 결과다. 최은순, 한동훈, 명태균, 김용현 등 나머지들은 증상이다. 원인과 결과가 사라지면 증상도 자연스레 사라진다. 단 그들이 저지른 내란은 우리의 역사에 영원히 박제되어야 한다.
촛불에서 빛의 혁명으로
518 광주민주화 운동과 1987년 체제 이후 지금껏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의 명징한 상징은 단연 촛불이었다. 촛불혁명이었다. 2002년 6월 우리가 월드컵에 열광하던 순간에 미군 장갑차에 깔린 효순이 미순이의 비극에서 시작된 촛불 하나가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로 광장에서 횃불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촛불혁명은 한 외신기자가 "나라가 어두울 때 그들은 집에서 가장 밝은 빛을 가지고 나온다"라고 말했듯이 빛의 혁명으로 진화·발전되었다. 8년전 단 하나의 빛깔이던 수백만 개의 촛불이 2024년엔 화려하면서 역동적이고 세상을 밝히는 빛의 혁명으로 진화 발전되었다.
죽은자가 산자를 살렸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 그래서 칼 마르크스는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다음번은 희극으로'라고 말했다. 비극의 역사는 이기적이고 무도한 자들에 의해서 언제나 반복되곤 했다.
프랑스 나폴레옹 1세와 그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테타가 그랬다. 필리핀의 독재자였던 마르코스의 아들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십 년도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을 겪었다.
하지만 이번 12.3 내란 사태는 5.18 광주민중항쟁이라는 대한민국 비극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윤석열을 비롯한 무도한 자들이 벌인 내란(친위 쿠테타)을 막았다. 산자가 죽은 자를 살릴 수는 없지만 45년 전 광주에서, 전남도청에서 죽은 자들이 2024년의 산자들을 살렸다.
성숙한 시민의식
14일(토) 탄핵 집회 장소에 가기 전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탄핵 집회 참여 인원이 많을게 분명했다. 7일(토)에도 지하철에서부터 집회 현장까지 가는 과정이 험난했다. 게다가 8년 전 탄핵 집회 인원이 광화문과 시청 광장 등으로 분산되었던 것과 달리 여의도 공원과 국회 앞은 넓지 않았다.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안전사고가 염려되었다. 하지만 지하철은 정류장마다 안전요원이 배치되어 승객을 적정하게 분산시켰고 탄핵 집회 현장도 곳곳에 안전요원과 경찰들이 배치되어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질서를 유지했다.
탄핵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여의도역은 사람이 너무 몰려서 경찰들이 입구를 막았다. 샛강역까지 걸어서 갔다. 하지만 샛강역 지하철 입구도 길게 줄을 섰다. 시간은 더디고 다리는 아팠지만 어느 한 사람 불평하지 않았다.
답답한 인터넷, 통신사들은 왜?
아쉬운 점도 있었다. 내가 있던 집회장소는 본 무대와 좀 떨어진 곳이었다. 상황을 알수 있는 모니터가 없었고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집회 현장에선 와이파이나 LTE가 잡히지 않았다. 국회 표결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8년 전에도 그랬다.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동 통신사들은 이런 상황을 충분히 예상했을 텐데 기술적으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탄핵 현장에 있지만 표결 과정을 모르니 정말 답답했다.
고심끝에 지인에게 전화를 했다. 지인과 통화를 하며 실시간 이원중계를 했다. 그리고 잠시후 탄핵 표결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함성 소리 때문에 지인도 정확한 결과를 확인하지 못했다.
"아! 형님, 탄핵 가결이에요."
"가결됐어? 정말! 정말!"
"네, 가결이에요. "
"찬성은 몇 표야, 몇 표?"
"탄핵 찬성 204표예요. 기권 3표, 무효 8표 반대 85표예요."
찬성 204표다.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아직 내 주변은 조용했다. 아직 표결 결과를 잘 모르던 시민 한분이 내게 결과를 물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람도 답답했는지 내게 다가와 묻는다.
"탄핵 가결이에요?"
"네, 가결이에요."
"정말요. 와, 찬성이 몇 표예요?
"찬성 204표예요. 204표."
그제서야 내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성소리가 울려 퍼졌다. 짜릿했다. 정말 다이내믹 코리아다. 윤석열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우리가 그를 뽑아버렸다. 간절한 소망은 축제가 되었다.
윤석열 탄핵안이 가결 되는 순간, 켜켜이 쌓였던 분노와 슬픔의 시간을 단번에 축제와 환호의 공간으로 변했다. 현장에서 직관하며 경이로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유명인(연예인)과 일반인들의 집회 참여자들을 위한 선결제, 재치만점 문구로 가득한 깃발들, 200만 명이 머물다 떠난 자리가 깨끗한 광장. 참 독특한 민족이다.
12월 3일(화) 느닷없이 우리에게 던져진 계엄의 밤, 망설임 없이 국회로 달려간 국회의원과 수천 명의 시민들, 계엄해제 결의의 새벽, 이어진 탄핵의 나날들. 나를 포함해서 12.3 내란사태라는, 자신의 생애에 처음 겪었을 공포와 불안으로 절망과 탄식이 대한민국 곳곳에서 흘러 넘쳤다. 하지만 우리는 분노했고 용서할수 없었기에 수백만이 광장으로 나갔다. 12월 14(토)일 마침내 윤석열 탄핵안이 가결됐다. 이제 헌재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