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의 선
5화 요약
소진과 경은은 점심을 먹기 위해 병원 근처 갈비탕 전문점에 들어간다. 식사 중 경은은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던 과거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고, 소진은 경수가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병실로 돌아오고, 경수의 침대 옆에는 커다란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다. 맞은편 침대의 어르신이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가 다녀갔다고 알려주고, 소진은 익숙한 향수를 맡으며 K를 떠올린다.
7.
경수는 담백한 사람이었다. 외모도 성격도 평범했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누군가 후천적인 매력을 상상한다면 그때서야 어렴풋하게 떠오를 법한 외모였다. 키는 180으로 컸지만 체격은 말랐다. 무릎이 트인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었고 흰 남방이나 티를 입고 다녔다. 각진 얼굴에 코는 평면적이었고 피부는 희었다. 이마는 넓었지만 인중이 좁아서 웃을 때면 검붉은 입술이 동그란 모양으로 벌어졌다. 간혹 큰소리로 웃을라치면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경수는 언제나 혼자였다. 사람들이 먼저 전화를 하면 반가워했지만 그가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었다. 너무 조용해서 가끔은 자폐아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학교에서 경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과대표를 제외하면 과에서도 경수라는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별개였다. 경수는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 모두를 허락하지 않았다. 가족은 몇인지 사는 곳, 고향, 출신학교, 취미 등 미스터리였다. 남자든 여자든 누군가를 사귄다는 것에는 오래전부터 초월한 모습이었다.
어느 날 소진이 과 후배들과 회의를 하고 있을 때 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경수? 웬일이냐, 네가 먼저 전화를 다하고."
"선배. 진짜, 진짜, 경수예요?"
"난, 그 자식 아예 벙어리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네."
"어, 저는 경수가 말을 하는 걸 처음 봐요."
손거울을 보고 있던 시원이가 놀란 듯 말했다. 다른 후배들도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경수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보답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정도로 세심하고 예민했다. 때문에 원하지 않는 호의를 받았을 때는 매우 부담스러워했다. 겨우 이어진 관계조차 상대방이 다가가려 하면 경수의 경계선에 부딪혔다. 그의 경계선은 반경 1.5미터였다.
하지만 경수는 과대표와는 허물없는 사이였다. 과대표는 유일하게 경수가 그어놓은 선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배짱 두둑하고 호방한 성격의 과대표는 외모도 영화배우처럼 잘생겼고 운동이며 공부도 항상 상위권에 들었다. 두 사람은 초등학교시절부터 단짝이었다.
그런 경수가 어느 날 학교에서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아무도 경수가 없어진 사실을 몰랐다. 소진과 후배들은 보름이 지나서야 과대표를 통해서 경수가 군에 입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경수의 동기 여학생들이 졸업반이 되었을 때 경수는 다시 학교에 나타났다. 하지만 경수를 알아보는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은둔형 외톨이, 나이 든 편입생 정도로 알고 있었다.
"소진 선배."
화사한 토요일 오후였다. 소진이 학교 정문을 지나칠 때였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스포츠머리를 한 사내가 소진을 향해 큰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선배, 저예요. 경수, 경수라고요."
소진은 멀리 있는 경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경수가 소진의 그림자 끝에 머물고 나서야 경수라는 사실을 알았다. 경수가 소진에게 먼저 다가와서 아는 체를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경수는 변해 있었다. 살집이 붙었고 하얗던 피부가 까무잡잡했다. 허리도 꼿꼿하게 펴고 걸음걸이도 달라졌다. 군대라는 환경이 그를 변하게 한 것일까. 경수의 선이 조금 넓어진 것일까?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분하고도 어딘가 고요했다.
강의가 끝나면 우리는 전공 서적을 아무렇게나 가방 속에 구겨 넣은 채 학교 근처의 싸구려 호프집이나 십 분에 삼백 원 하는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경수도 함께했지만 그는 여전히 도서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서 르네상스 시대의 셰익스피어 희곡을 탐독하거나 휴게실에 배치된 그 날치 일간지 십여 개를 꼼꼼히 읽었다. 때로는 창가에 앉아 턱을 괴고 하늘을 바라보며 날이 저물도록 몽상을 했다.
그렇지만 이전과는 분명히 달랐다. 이제 경수는 가끔 먼저 말을 걸기도 했고, 웃음소리를 낼 때도 손으로 입을 가리는 대신 활짝 웃었다.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을 때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변했지만 본질은 그대로였다. 경수는 여전히 담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