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 자유 속에서 더 절실해지는 감정
그렇게 나는 자전거 위에서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답답한 삶을 조금씩 해방했다. 하지만 해방된 삶이 외로움이나 결핍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뜻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해방된 자유 속에서 더 절실해지는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결핍이 주는 불안함과 고독감이었다. 그런 결핍 중 하나는 ‘다정함’이다.
나는 살면서 ‘다정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가족도, 친구도, 한 때의 연인조차도 나를 ‘다정한 사람’이라고 불러 준 적이 없다. 잘해야 무심한 척 챙겨주는 사람이다. 억울하거나 섭섭하지는 않다. 다정함도 재능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는 본래 다정한 사람이 아니니까. 오히려 사는 동안 ‘무뚝뚝하다.’거나 ‘까칠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는 감정 표현이 서툴고 말도 잘 못한다. 그렇다고 다정하고 싶은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상대방에게 내 감정을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정함’이란 어떤 마음의 모양일까? 말이나 태도로 표현되어야 하는 걸까? 누군가의 커다란 고통이나 슬픔 앞에서 말없이 옆에 있어 주는 일, 서툴지만 고마움이나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 쓴 메모나 편지를 전해주는 것, 이런 모습도 다정함이 아닐까.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이 이지안에게 보여준 무심한 챙겨줌이나,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최한성(이선균 분)이 한유주(채정안 분)에게 보여준 스위트함 중에서 어떤 모습이 다정함에 가까울까?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내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는 더 멀어진다는 것. 다정함은 나에게 실존적인 질문과도 연결이 된다. 오래전 인터넷에서 본 글 하나가 나를 잠시 멍하게 했다.
“혼자 살려면, 사흘 동안 연락이 끊겼을 때 전화를 걸어줄 사람이 적어도 세 명은 있어야 한다.”
짧은 한 문장이 내 뒤통수를 툭 치는 듯 강렬한 느낌이었다. 나는 일주일이 넘도록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정말 혼자 있는 내게 위급한 상황이 생겨서 연락조차 못 하게 되면 하루, 이틀, 사흘... 누군가 내 방문을 똑 똑 똑 두드리며 나의 생존을 확인할까?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나오는, 사형수 뫼르소를 향한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노크’가 아닌 내 구원의 문을 두드리는 세 번의 노크를 해줄 사람이 있을까?
다정함은 혼자서 정의되지 않는다. 다정함은 누군가와의 따스한 연결이다. 그런 내가 언제부턴가 지인들에게 전화를 잘 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길게 통화하는 게 버겁고, 간단한 안부 인사조차 머뭇거리게 된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한 문장을 접하고 나서부터는 불안과 두려움이 생겼다.
‘지금 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쓰러진다면... 누가 가장 먼저 알아차릴까?’
혼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떠올려봤을 질문이다. 그저 상상일 뿐이라 해도, 마음 한편이 불안하고 쓸쓸해진다. 그래서 나는 다짐해 본다. 다정함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능한 한 자주 내가 당신을 생각하고 있음을, 그리고 나는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일을 할 거라고, 사소한 안부라도 먼저 건네는 사람이 될 거라고, 누군가의 ‘사흘’을 넘기지 않는 사람이 될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가끔은, 당신이 전화나 문자로 나의 안녕 또한 물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