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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서울 Nov 28. 2020

나의 글그릇은 몇 리터일까

(feat.탈서울에 실패한 변명)

안식휴가를 다 써버리고 돌아온 2020년 11월 서울 광화문의 가을. 


내가 탈서울에 실패하고 서울에 돌아와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처음에는 좌절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서울을 벗어나 새 삶을 일구고 싶은 강렬한 소망, 하지만 간절히 원하는 것을 실행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결국 생활인으로서 일자리를 포기할 수 없는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것과 상반된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아분열 상태로 지난 한 달을 살았던 거 같다.


한 달 전을 생각하면 꿈만 같다. 3주는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휴가가 끝나갈수록 불안은 짙어졌다. 정읍에 머물며 끄적일 것이 남아 있었는데, 회사 복귀가 가까워올수록 한 글자도 써 내려갈 수 없었다. 어떤 날은 하루가 통으로 주어졌는데도 다시 노트북 앞에 앉지 못했다.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다시 돌아가는 회사는 나를 새 팀으로 인사이동시킨 상황이었다. 거의 2년 만에 다시 새 업무, 새 동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8년 동안 이어진 익숙한 불안임에도 상태는 나아지질 않는다.


노란 양탄자가 깔린 거리와 은행나무 가지 사이로 내려온 오후 햇살. 오랜만에 돌아온 서울은 여전하다.


 11월 한 달 간은 집에 오면 늘 누워 지냈다. 밥을 먹어도 감각이 없고, 운동과 건강관리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출근하는 일이 잦았다. 먹는 양 자체는 크게 늘지 않았는데 불규칙하게 먹어서 그런지 한 달 사이 3kg이 늘었다. 컨디션이 나빠지면 바로 몸에 나타나는 편이다. 하지만 내가 이 상태라는 걸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다. 불안은 나누면 두 배가 될 뿐이기에, 회사에서 '아픈 애', '힘든 애'가 될 순 없기에. 잦은 조직개편과 빈번한 인사이동으로 난 더 이상 에너지가 없었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1~2년, 팀 이동을 할 때마다 닥치는 이 익숙한 불안에서 언젠간 꼭 탈출해야지.


하지만 생계가 달린 일자리를 버릴 만한 용기가 내겐 없었다. 이젠 더 이상 휴가가 남아있지도 않고, 정읍에 몇 주나 가있을 수도 없다. 끊겨버린 탈서울 일기를 끄적이지 못하는 아쉬움을 지인에게 토로했다. 회사에서 일하고 집에 오면 씻거나 눕거나 밥을 먹을 뿐. 글자를 끄적일 에너지는 1도 남아있지 않다고. 알고 지내는 작가님이 날 위로하며 자기만의 '글그릇'이 있는 거라고 말해줬다. 사람마다 글을 쓸 수 있는 총량은 정해져 있는데, 회사에서 일로 글그릇을 다 써버린 사람은 집에 와 더 이상 끄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내 글그릇 용량이 1리터라면, 그리고 회사에서 1.5리터 이상을 써버렸다면, 집에 와서는 1미리도 끄적일 수 없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되었다


어제는 마망에게 전화가 왔다. 한 달간 뭐하고 사는지 전화 한 통이 없다며, 코로나 때문에 걱정이 된다고 하셨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또 한 달이 갔구나. 지금이라도 탈서울에 실패한 변명을 남기고, 실패한 나를 인정하고, 오늘부터 또 하루를 살아가자. 오늘로 인생이 다 끝난 게 아니니까. 미래는 또 오고 있으니까. 탈서울에 대한 내 소망은 아직 접지 않았다.

내가 열세 살 때부터 앉았던 정읍사공원의 벤치. 그 앞에 새로 자리 잡은 빨간 단풍나무와 가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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