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드가 <모자를 만드는 여인>, <목욕 후>
지금은 지하철을 탈 일이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매일같이 타던 지하철의 기억은 유난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 플랫폼에 서 있는 동안 나는 늘 사람 없는 칸을 바라며 조용히 기도하듯 기다리곤 했다.
아침 지하철은 늘 숨이 막혔다. 서로의 어깨가 닿고, 낯선 가방이 옆구리를 밀치고, 옆사람 에어팟에서 음악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순간마다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그 좁은 틈에서 누군가 한숨이라도 쉬면, 그 바람 한줄기에도 이유 모를 짜증이 솟구쳤다. 그러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 감정은 분노라기보다 피로에 가까웠다. 혐오는 그렇게 시작된다. 이유 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말투 하나, 표정 하나가 불씨가 되어 마음 깊은 곳에서 천천히 번져나간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감정은 그들이 아니라, 내 안의 여유가 바닥나 생겨난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사람들과 함께 밀려나오면, 묘한 공허함이 남았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도 미웠던 사람들이었는데 막상 내리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순식간에 사그라지는 감정.
나는 이런 감정을 지하철에서, 회사에서, 관계 속에서 여러 번 겪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동시에 나를 미워하게 되는 순간들.
‘왜 나는 이렇게 예민할까.’
‘왜 이렇게밖에 반응을 못할까.’
혐오는 결국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향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런 나를 이해하고 싶어, 혐오하던 순간들을 계속 되짚었다. 지하철의 기억이 유난히 선명한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그런 마음을 안고 걷던 어느 날, 게티에서 에드가 드가의 작품이 발걸음을 붙잡았다.
에드가 드가
여성 혐오 논란이 있었던 드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평생 여성을 그렸다. 인상주의로 분류되지만 그는 밝음보다 그 밝음을 지탱하는 ‘그림자의 무게’에 더 관심을 가진 화가였다. 신경질적이고 까다로운 성격, 예민한 시선은 인물의 치장된 모습보다 ‘견디는 모습’을 포착했다. 발레리나의 뒤틀린 발목, 빨래하는 여인의 굽은 허리, 눈을 감고 바늘을 꿰는 손끝—드가는 화려함의 앞면보다 그 뒤의 묵묵한 버팀을 그렸다.
게티의 <모자를 만드는 여인> 역시 그랬다. 어두운 방 안 두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모자를 다듬고 있다. 천을 자르고, 꽃잎을 달고, 손끝으로 바늘을 꿰는 모습은 겉보기엔 평온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굽은 어깨에는 피로가 내려앉아 있고, 표정에는 힘이 없다. 마치 그림 자체가 “컷당한 사진”처럼 느껴질 정도로, 프레임 밖의 무게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드가는 아름다움을 찬양하지 않았다. 그 아름다움을 떠받치기 위해 버티는 여성을 그렸다. 우아함의 뒤편에 놓인 노동, 화려함의 아래층에 깔린 버팀. 그는 사람을 꾸며 그리지 않았고, 그들이 버티는 방식을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사실 드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발레리나다. 그는 여성에 대해 혐오를 숨기지 않고, 심지어 “여자의 수다를 듣느니 울어대는 양 떼와 있는 게 낫다”고 말하기도 했음에도 평생 여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왜 그랬을까.
그 모순은, 오히려 그의 마음 한가운데에 뒤틀린 방식의 애정과 두려움이 동시에 자리했음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삼촌의 불륜을 목격하고, 어머니를 일찍 잃고, 아버지마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드가는 너무 이른 나이에 사랑의 상처를 배워버렸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 속 여성들은 미화되지 않지만, 비하되지도 않는다. 그저 ‘거기 있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실제 19세기 프랑스의 발레리나는 생계를 위해 춤을 택한 가난한 여성들이 많았다. 무대 위에서 빛나지만, 동시에 극장의 후원자들의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드가의 <스타>를 보면, 무대 위 발레리나는 빛나지만 얼굴은 일그러져 있다. 기쁨과 고통이 동시에 섞여 있고, 그 뒤엔 신사 복장의 남자가 그림자처럼 서 있다. 발레리나가 ‘예술가’이기 전에 ‘감시받는 여성’이었다는 현실이 그림의 공기를 무겁게 만든다.
게티센터 W관에 있던 드가의 <목욕 후>에서는 더욱 분명했다. 구부러진 등, 젖은 머리카락, 붉어진 어깨. 포즈도 없고 꾸밈도 없지만, 그 안에는 살아 있는 체온과 하루를 견딘 흔적이 있었다. 드가는 그걸 추함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는 그걸 존재라 불렀다.
그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으니 지하철의 아침이 떠올랐다.
그렇게 선명하게 남아 있던 지하철의 기억은 좋아서가 아니었다. 숨 막히던 답답함과 혐오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도 낯설게 남아 있었고, 어느 순간 나는 그 감정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왜 그토록 싫었을까.
무엇이 나를 그렇게 예민하게 만들었을까.
드가의 그림 앞에서 그런 질문들이 천천히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는 혐오에서 출발했지만, 그 감정을 피하지 않고 오래 바라보았고, 결국 ‘버티는 인간의 실루엣’을 남겼다. 있는 그대로 여성을 그리며, 어쩌면 그는 자기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세계를 화폭에 담았는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나도 내가 혐오했던 순간들을 직접 그려볼 수 있다면— 지하철의 답답한 칸, 서로에게 기대며 버티던 몸들, 그리고 예민한 내 마음까지— 그 감정을 지금보다 훨씬 깊게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혐오는 겉으로는 밀어내는 감정처럼 보이지만, 오래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나의 피로, 나의 결핍, 나의 그림자가 비친다. 그림을 그리듯 천천히 관찰한다면, 미워하던 얼굴들에서도 어쩌면 드가가 포착했던 것처럼 ‘살아 있는 흔적’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세상이 가끔 거칠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마음 한켠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드가가 끝내 보지 못한 것을 나는 그의 그림을 통해 배운다. 버티는 사람들, 살아 있는 몸, 그리고 오늘을 견디는 나 자신까지. 혐오의 반대말이 꼭 사랑일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약간의 거리, 약간의 관찰, 그리고 아주 작은 이해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천천히 나를, 그리고 세상을 덜 미워하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벌써 11월 중순이네요! LA, OC 지역은 모처럼 비가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또 게티가서 많은 작품들 공부하고 일상과 곁들인 작품 설명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