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그리고 과학 4
진화론과 창조론에 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직 너무나도 많다. 유인원부터 시작해서 젊은 지구, 미토콘드리아 이브, 캄브리아기 대폭발, 인간의 신체 등. 맘만 먹는다면 각각의 주제들로 책 한 권씩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 모든 것들보다도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과학’이라는 주제로 계속해서 고민을 하던 와중에 하나의 생각이 나의 마음을 계속해서 괴롭혀왔다. ‘이 모든 것을 심도있게 다루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던 첫번째 이유는 우리가 봐온 창조에 관한 수 많은 논증들 중 신의 존재를 100% 증명할 수 있는 완벽한 증거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생명과 우주를 논하며 말한 모든 주장들은 결국 신이 있다는 주장에 대한 논증(argument)은 될 수 있을지언정 증거(evidence)가 되지는 못했다. 물론 모두 쉽게 묵인돼서는 안되는 훌륭한 논증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도 얼마든지 재해석되고 논리적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들이 뚫려 있는 것들이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적절한 회의감과 함께 더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가게 해준다. ‘세상이 열광하는 그 과학이란 대체 무엇인가? 애초에 과학으로 신을 다루는 것이 옳은 것인가? 과학이 더 발전한다 해서 창조와 진화의 대립이 끝날 수는 있는 것일까? 그 대립이 끝날 기미가 보인다기에는 아직 서로의 진영에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넘쳐나지 않는가?’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현실에 비해 우리의 과학이라는 것은 모두 초보적이고 유치한 수준이다. 물론 앞으로 과학이 발전한다면, 자연의 더 많은 부분이 나름대로 ‘해석’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해석’에 불과하다. 과거 그레고어 멘델이라는 과학자가 유전법칙을 발견했을 때에도 어떤 이는 이것을 무신론의 정수라고 주장했지만, 또 어떤 이는 이것을 유신론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처럼, 결국 앞으로 나타날 발견도 다방면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견이 될 것이다.
사람들의 지나친 기대와 확신과는 달리 과학은 모르는 것도 많고 언제, 어떻게, 어떤 이유로 돌변할지 모르는 참으로 예민한 학문이다. 물론 이 사실과는 별개로 신에 대해 합리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탐구하며 그에 대한 논증을 펼쳐보는 것은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다. 신의 존재에 관한 논증은 여전히 각 사람이 지닌 전제를 토대로 실존적인 결단과 선택을 하도록 돕는 이성적 성찰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인간이 직접 전체적으로 포괄할 수 없는 신에 대한 이해 가능성을 한 측면에서라도 높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특히나 과학으로 신을 논하는 것이 가치는 있을지언정 완벽해질 수는 없다. 그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무신론자 스티븐 제이 굴드도 이 사실을 강력하게 시인했다.
“나의 모든 동료를 향해 수백 번도 더 반복해서 말한다. 과학이 아무리 합리적인 수단을 이용한다고 해도 자연을 관리하는 신의 문제를 판단하기란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것을 증명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우리 과학자들은 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수 없다.”
과학이 불완전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의 과학은 아주 사소한 발견 하나만으로도 완전히 무너지기도 하고 또 뒤집어지기도 하는 학문이다. 둘째, 과학은 절대로 형이상학적인 세계 - 사랑, 윤리, 도덕, 아름다움, 의미, 목적, 자유의지와 같은 비물질적인 심오한 것들을 다루는 세계-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과학은 형이상학적 세계가 아닌 물질적인 세계를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기술이 부족해서 그 세계를 탐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세계를 탐구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리차드 도킨스와 같은 자연주의자(유물론자)들은 사랑이라는 개념을 호로몬의 변화 등으로 해석하면서 언젠가는 현대 과학으로 우리가 형이상학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게 되리라고 믿지만, 이는 아직 허무맹랑한 주장일뿐더러, 나로서는 형이상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 모든 것이 물질과 과학만으로 설명되는 세상에서는 단 하루라도 살고 싶지 않다. 리차드 도킨스가 말하는 세상은 다윈의 이론은 실재하고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는 실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것은 무슨 의미이겠는가? 세상에는 사후 생명이 존재하지 않으며,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 기반이 없고, 삶에 궁극적인 의미도 없으며, 인간의 자유의지 또한 없다는 의미이다. 철학이 죽은 세상이다. 우리는 우연의 연속으로 어쩌다가 만들어진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 인생에서 의미란 ‘생존’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개개인이 어떻게든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고, 이를 통해 모든 고통을 이겨낸다 할지라도, 결국 우리는 죽음 앞에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런 세상에서 나는 절대로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무신론을 거부하는 첫번째 이유이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과학이 불완전할수밖에 없는 마지막 세번째 이유는 과학에 도움이 될만한 새로운 정보가 발견되었을 때, 그 정보에 대한 전문가들의 반응은 절대로 단순히 한 가지로 귀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해당 정보에 관한 다양한 설명과 가능성 있는 해석을 모두 모아놓고 그 중 어떤 것이 ‘진리’에 가장 가까울지 탐구하고 토론한다. 그러고 나서 어떤 설명을 진리로 믿을지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결국 믿음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은 세상을 관찰하고 이해한 다음 무엇을 믿을지 결정하기보다는 이미 믿기로 결정한 무언가를 기반으로 해서 세상을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뿌리는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의지적인 결단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나 저러나 결국 아주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결론에 도달할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은 믿고싶은 것을 믿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이 결론에 도달한 순간, 나는 이 책에서 과학적 지식에 대해 더 논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창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모든 노력과 그것의 결실을 아무리 설명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믿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리차드 도킨스가 그의 자서전에서 남긴 말이 내게는 너무나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예전에 나는 입에 발린 소리로나마, 누군가가 설득력 있는 증거를 보여주기만 한다면 나도 하룻밤 사이에 초자연주의자로 변하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신이라면 그런 증거를 제공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느냐고 가정했다. … 요즘은 그런 확신이 줄었다. … 만일 예수가 광휘에 둘러싸여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혹은 하늘의 별자리가 갑자기 움직여서 제우스의 이름이나 올림포스산 신들의 이름을 모두 써 보인다면 어떨까? 그때 나는 ‘초자연적’ 사건이 자연법칙을 뒤엎었다는 회피적인 가설에 굴복하는 대신, 내가 꿈을 꾸고 있다거나, 환각을 보고 있다거나, 그도 아니면 외계인 물리학자나 데이비드 코퍼필드 같은 외계 마술사가 꾸민 교활한 착시에 걸려들었다는 가설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의 고백에서 강한 의지(will)을 보았다. 지적 인식의 결과로 무신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믿는 것이 ‘사실’이기를 갈망하며 그 믿음을 의지적으로 선택했다 느껴진 것이다. 뉴욕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지금은 명예교수가 된 유명한 무신론자 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도 비슷한 고백을 남겼다.
“나는 무신론이 참이기를 원한다. 그런데 내가 아는 지인들 가운데 가장 똑똑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들 몇몇이 종교를 가진 신자라는 사실에 내 마음이 불안하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니다. 사실 나는 당연하게도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나의 믿음이 옳기를 희망한다.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나는 신이라는 존재가 아예 없기를 원한다. 나는 신이 있는 세계, 신이 있는 우주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지적인 차원에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서 멈추는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적인 측면에서 신이 없기를 희망(hope)하고 원한다(want)고 말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무신론을 합리적이라 느끼며 선택했던 것이자 동시에 그 무신론을 믿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무신론을 의지적으로라도 믿고싶은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신이 있다는 것은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이끌어가고, 통치하는 초월적 존재가 있다는 의미이며, 이는 곧 신이 이 세계의 원인이고 과정이자 목적이 된다는 것이다(로마서 11:36). 그렇게 되면 모든 생명체에는 신이 창조한 목적이 존재하게 되며, 당연히 인간에게도 만들어진 목적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신이 있는 세계에서는 그 신의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이 선(goodness)이다. 이는 동시에 모든 생명체의 본질적인 주인의식이 그들 자신이 아닌 신에게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신이 없다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신이 없다는 것은 모든 생명체에 만들어진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모두 그냥 어쩌다가 생긴 아주 독특한 먼저 덩어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탄생한 목적이 없는 그들, 다시 말하자면 본질적인 생명의 주인이 없는 그들에게는 자신의 삶에 원하는대로 목적을 부여할 기회가 생긴다. 내가 내 인생의 유일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오직 나만이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이 자기중심성이 무신론을 선택하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유신론과 무신론 둘 다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믿는 것이 사실이냐 아닌가라는 진리적 탐구가 아닌 “유신론과 무신론 가운데 어느 사상이 존재하는 세계와 우리 자신의 삶을 제대로 설명하고 살 만한 가치를 부여해 주며 참된 의미를 주는가 하는 물음일 것이다.”
‘신 그리고 과학’이라는 주제를 끝마치면서 고백을 하나 하자면, 나 또한 남들과 다를바 없이 ‘하나님은 존재한다’라는 하나의 선입견을 갖고 모든 것들에 접근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나는 창조에 관해 읽고 들은 모든 것들에 대해 큰 놀라움을 느꼈다. 어쩌면 나와 같은 부류의 크리스천들은 희미하고 모호한 창조의 흔적들만 발견했어도 나름 만족스러운 신앙의 뒷받침으로 여기며 대강 마무리를 지으려 했을텐데, 우리 눈 앞에 나타난 것들은 모두 그 이상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학자들의 이성적인 설계자를 지지하는 압도적인 증언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의 설명은 ‘설득력있다’ 정도의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무신론을 거부하고 신을 선택하게 된 본질적인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이론뿐인 과학은 그저 유신론이나 무신론을 선택하는 진짜 이유를 덮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대신, 그 과학으로 인해 드러난 자연의 아름답고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며, 나는 더욱 신을 선택할수밖에 없었다.
우주에 관한 영상을 한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영상을 통해 우주의 광대함을 마주할때면 우리는 그 우주에 대한 공포감 혹은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수천년 전 고대 사람들이 신으로 모시며 섬기던 해와 달은 실제 우주의 아주 작은 모래 알갱이에 불과했고, 그 모래 알갱이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인류의 기술로는 대략 36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그 모래 알갱이들로 가득 찬 우리의 은하마저도 실제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아주 작은 우물에 불과했다. 아니, 사실은 그 은하마저도 온 우주의 아주 작은 모래 알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광활한 우주에 아주 작은 행성, 또 그 안에 사는 우리 인간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그 정체성은 단 하나의 선택을 통해 극과 극으로 나뉘게 된다. 물론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게 된 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점에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선택에 의해 그 존재의 본질적인 가치는 굉장히 달라지게 되는데, 바로 신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에 대한 선택이다. 만약 신이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인간의 생명이라는 엄청난 기회를 얻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연에 의해서든 무한대의 우주 속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귀한 우주에서 태어난 것이든)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여전히 인간은 우연히 탄생한 조금 특별한 생명체일 뿐이며, 여전히 광활한 우주에 아주 작은 먼지, 아니 그 먼지보다 더 작은 존재, 그리고 극악의 확률을 뚫고 엄청난 생명의 시간을 가졌으나 그 영향력은 여전히 온 우주의 티끌의 티끌에도 못미치는, 영원에 비하면 한없이 짧게 빛났다가 순식간에 소멸되는 무의미한 존재이다.
하지만 신이 있다면, 그리고 만약 그 신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면, 우리의 정체성은 180도 달라진다. 신은 감히 우리로 하여금 그가 만든 우주를 헤아리는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우주와 아름다운 자연법칙, 그 외 모든 것들을 만든 신의 형상을 본따 만들어진 존재이자(창세기 1:27), 그 신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사무엘하 12:25). 그 광활한 우주가 존재하고 또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저 운 좋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없이 작은 존재들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고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우주를 만든 신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럼에도 그 작은 존재가 삶 속에서 그에게 드리는 선물을 기쁨으로 받으신다(로마서 12:1). 그 작은 존재에게 주어진 시간은 신의 영원함에 비하면 아주 짧게 빛나고 소멸될 정도였지만, 신은 그 작은 존재에게 그가 가진 ‘영원’을 허락하셨다(요한복음 3:16). 심지어는 그 영원 속에서 그들을 자신의 자녀로 삼겠다고 약속하신다(요한복음 1:12).
신이 없다면 모든 우주와 모든 만물 그리고 나의 생명은 모든 의미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신이 있다면 그 모든 것에 의미가 생긴다. 나는 그 의미를 위해 무신론을 거부한다. 설령 내 삶의 주인이 내가 될 수 없다 할지라도 상관없다. 그가 없었다면 난 이미 의미를 잃은 존재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