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을까요?
악을 가능케 하는 것도 자유의지만, 사랑이나 선이나 기쁨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도 자유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by C.S.루이스
고통과 자유. 이 둘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자유가 없었다면 고통도 없었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먼저 기독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개념인 '자유의지'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이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깊이 있고 복잡한 질문이지만, 고통이라는 주제만을 위하여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자유의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매 순간 다양한 선택지를 직면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무언가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허락된 그 자유의지는 단순히 내가 어떤 음식을 먹을지 혹은 내가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지 정도의 가벼운 선택권이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자유의지는 진정으로 중요한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유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불구로 만들며 심지어 신성한 계획을 좌절시킬 수 있는 선택"도 그러한 자유의 일부분이다.
자유의지와 인간의 고통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삶을 이어나가기 시작했고, 각자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사고방식으로 인해 각자가 걸어가는 길을 옳다고 주장하면서 남의 행복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으며, 이 길이 언제 끝나는가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이 길이 맞는가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길을 걸어가다 넘어지면서 느끼는 절망과 슬픔이 인간의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신이 허락하신 그 자유의지를 이용해서 서로에게 상처주고 있다. 심지어는 그 자유의지를 통해 신을 거부한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에덴동산에서의 삶을 잃어버린 것도 이 자유의지 때문이다. 즉, 세상에 나타나는 거의 모든 도덕적인 악은 우리의 '선택의 자유' 때문에 발생했다.
그래서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차라리 자유롭지 않더라도 평생 행복할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무언가를 선택할 필요도 없이 개인에게 가장 적성에 맞는 일이 직업으로 정해져있고 그 일을 함으로써 삶에 대한 만족을 느끼고 거기에 더해 갈등이 없는 사랑을 통해 평생 행복한 감정만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차라리 선택의 자유가 없는 대신 서로간의 의견 충돌이나 슬픔도 없는 세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펼쳐졌다면 그것이 더 아름답지 않았겠는가!'
개인의 자유와 선택으로 인해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일들이 벌어질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셨는가? 그랬다면 그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하나님이 정말 전지전능하시다면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였을 때 그리고 그들이 그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했을 때 무슨 일들이 벌어질지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그것을 허락하셨다. 그렇다면 그는 악한 것인가?
이 점에 대해 기독교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우리는 그가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이유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이롭게 혹은 해롭게 할 기회가 많은 세계를 창조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허용되는 악의 정도와 같거나 혹은 그보다 더 큰 선을 만들기 위함이다.”(신은 존재하는가 pp.174)"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볼 질문은 다음과 같다. 대체 하나님께서 보신 그 자유의 가치란 무엇인가? 신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는가? 정말 그것이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제 우리는 우리의 질문에 대한 그분의 대답에 귀를 기울일 차례다.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 중에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작품이 있다. 그리고 이 희극의 줄거리를 읽어보면 '사랑의 꽃'이라는 아주 재밌는 아이템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꽃을 즙으로 만들어 자고 있는 사람의 눈에 바르면 그 사람은 잠을 깨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맨 처음의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작품에 나오는 여주인공 헬레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드미트리우스라는 남자를 사랑했으며, 그를 향해 끊임없이 사랑의 고백을 전해왔다. 그러나, 이미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던 드미트리우스는 헬레나의 구애를 계속해서 거절했으며, 심지어는 그녀의 외모를 비하하는 발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은 함께 요정들이 사는 숲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드미트리우스는 사랑의 꽃의 힘으로 인해 헬레나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는 갑자기 그녀의 외모와 성품을 찬양하기 시작했으며, 그걸 들은 헬레나는 처음에는 매우 당혹스러워 했지만, 작품의 끝에 가서는 결국 그의 구애를 받아주면서 함께 연인이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한여름 밤의 꿈을 읽다 보면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사랑고백을 보게 된다. 그 중에서 드미트리우스를 포함한 몇몇의 등장인물들은 사랑의 꽃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대방을 향해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을 전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들의 사랑고백을 들으면서 일말의 설렘이나 로맨틱함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우스꽝스럽다고 느낀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고백에는 개인의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을 고백하는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은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해서 그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요소에 있어서 개인의 자유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다.
C.S. 루이스는 “자동기계-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피조물들-의 세계는 창조할 가치가 없다”라고 말한다.기계가 아무리 아름다운 목소리와 말투로 사랑의 고백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누구도 그러한 기계적인 고백이 자신의 의지로 부모의 입에 입을 맞추며 “사랑해요”라 말하는 어린 아이의 네 글자짜리 고백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때로는 부모의 말은 무시하고 하지 말라는 건 더 해서 속상한 아이지만, 그런 아이가 ‘자유 의지로 표현하는 사랑’은 부모에게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귀한 보물일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랑을 원했던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도 그런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말을 가진 희극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큰 고민 없이 “뜻대로 하세요”라는 작품을 선택할 것이다. 이 작품을 제외한 4개의 작품들에서는 주연들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동안, 일부 조연들이 마음에 앙심과 분노를 머금은 채로 복수를 다짐하면서 그들의 극을 마무리했다. 혹자는 “한여름 밤의 꿈”도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지 않냐고 주장할 수 있지만, 자유를 빼앗긴 채로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원히 한 사람을 사랑해야만 하는 드미트리우스와 그 사랑을 받을 헬레나를 생각한다면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가장 비극적인 희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비극적인 희극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물론 자유의지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평생 하나님을 향해 사랑한다는 고백과 찬송을 올려드리며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사랑고백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라고 확신했던 드미트리우스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속이 빈 사랑의 고백을 듣는 하나님은 그 고백에서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하셨을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이를 아주 근사하게 표현했다: “사랑받기를 원하는 이는 사랑의 대상을 노예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 사랑하는 상대가 로봇 같은 사람이 된다면, 사랑을 쏟는 이는 외로워질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역간)”
“뜻대로 하세요”에서는 이전에 악역이었던 인물들까지도 참회를 하면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결말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의 행복을 되찾는 모든 과정이 오로지 개개인의 ‘자발적 선택’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셰익스피어도 비슷한 이유 때문에 이 희극의 제목을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라 지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도 완벽한 희극의 시작은 다름아닌 ‘등장인물들의 의지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자유의지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희극을 만들었던 것처럼, 신도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각자의 역할을 맡아 움직이는 배우들에게 완벽한 희극의 시작인 자유의지를 선물해주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죽고 약 200년 뒤, 올더스 헉슬리라는 작가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수십년 뒤 “멋진 신세계”라는 사회를 그려냈다. 그가 상상했던 사회는 모든 사람이 고통을 느끼지 않고 행복한 감정만 느끼는 곳이다.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아무도 질병에 걸리지 않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 곳의 아기들은 모두 공장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육아라는 희생을 감당할 필요가 없다. 그 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직업이 정해지며, 각자의 직업에 완벽히 적응하고 만족할 수 있도록 신체적 및 정신적 특성이 조작된 뒤에 사회로 들어선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즉시 느끼게 해주는 “소마”라는 알약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개개인의 심리적인 고통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그 사회의 한 관리자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이제 안정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행복하고, 원하는 바를 얻으며, 얻지 못할 대상은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잘살고, 안전하고, 전혀 병을 앓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늙는다는 것과 욕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고, 아내나 아이들이나 연인 따위의 강한 감정을 느낄 대상도 없고, 마땅히 따르도록 길이 든 방법 이외에는 사실상 다른 행동은 하나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리고 혹시 무엇이 잘못되는 경우에는 소마가 기다립니다.”
작품에서는 이 사회를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작품은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 중 하나로 불린다. 독자들이 멋진 신세계를 디스토피아, 즉 암울하고 어두운 사회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곳에 사랑과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에 연인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가 맞지 않는 면이 발견된다면 쉽게 이별할 수 있는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서로간의 이해가 요구되지 않는 관계를 사랑이라고 정의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멋진 신세계에는 직업을 선택하거나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책에도 이러한 사회에 반감을 가진 이들이 더러 발견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이 문명에 개화되지 않은 한 야만인이 관리자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 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가? 그 이유는 비록 악이 존재하게 한 것도 자유의지지만, 사랑이나 선이나 기쁨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도 자유의지이기 때문이다. 슬픔과 이기심과 갈등과 고통과 어둠은 모두 자유가 맺은 열매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너무나도 괴롭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들을 통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슬픔이 있기에 기쁨과 행복의 가치를 알 수 있었고, 이기심이 있기에 이타심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갈등이 있기에 그것을 극복해낸 사랑의 무한한 가치를 경험할 수 있었고, 육아의 고통이 있기에 모성애의 귀함을 알 수 있었다. 삶에 어둠이 있기에 우리는 빛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의문점들이 남아있다. 이제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사실 우리는 자유의지가 왜 있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질문한다. ‘그래서 우리보고 어쩌라는 것인가? 우리가 궁금한 것은 자유의지가 왜 있는지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나타난 고통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가이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 내면에 있는 악함과 이기심으로 인해 옳지 못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선택으로 나타나는 고통은 우리보고 알아서 감내하라는 것인가? 다 인과응보이고 업보이니 그러한 고통의 시간 속에서 뼈저리게 후회하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기도 다짐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설령 우리가 자유의지로 옳은 선택을 했다 할지라도 타인의 악한 선택으로 인해 우리가 피해를 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것도 자유의지의 영역이니 하나님께서는 그냥 내버려 두신다는 것인가? 왜 전지전능하다는 하나님은 선한 이들이 악한 이들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만 계시는가? 아무리 선택과 자유의 문제라 할지라도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 아파하고 있는데 그것 또한 인간의 선택이었다고 말씀하시면서 내버려 두시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기 전에, 잠시 ‘기적’이라는 개념에 대해 짚고 넘어가려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차에 치이기 직전의 상황에 놓은 아이를 구출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혹은 누군가가 타인을 해치려고 할 때, 날카로웠던 그의 칼이 순간 풀잎처럼 부드러워지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그러한 일들을 하실 능력이 있으신가’라는 질문에 대해 확실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자연질서를 초월하는 일들을 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일을 행하기도 하시며 우리가 기적이라 부르는 일들을 행하기도 하신다고 믿는 그 믿음 또한 기독교 신앙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이고도 안정적인 세상에서는 그런 예외적인 일들이 극히 드물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그러한 기적이 넘쳐나는 세상을 우리는 무작정 선하다고 말할 수 없다. C.S. 루이스는 이를 체스 게임에 빗대어 설명한다. 체스를 하다보면 우리는 각자의 재량으로 상대방에게 양보해 줄 때가 있는데, 이는 기적이 자연법칙에 대립되는 것처럼 평상시 게임 규칙에 대립되는 행동이다. 우리는 말 하나를 없이 시작하거나, 상대방이 잘못 둔 수를 물러 줄 수 있다. 그러나 번번히 상대방의 형편에 맞추어 준다면 - 언제든지 수를 물릴 수 있게 해 주고, 상대방에게 불리할 때마다 자기 말을 치워 준다면 - 게임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즉, 우리의 일상적이고 가치 있는 삶은 자연질서를 초월하여 나타나는 기적들이 말 그대로 ‘기적적인 일’로 남아 있어야 유지될 수 있는 삶이다. “고통의 의미 찾기 (Making Sense Out of Suffering)”의 저자 피터 크리프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당신이 하나님이라 생각하고 더 좋은 세상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유토피아를 만들어 보십시오. 하지만 개선하고 싶은 것들의 파급효과를 잘 생각하십시오. 악을 막기 위해 힘을 사용할 때마다 당신은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모든 악을 완전히 막으려면 모든 자유를 빼앗아 사람들을 꼭두각시로 전락시켜야 합니다. 그럼 인간은 자유의지를 사랑을 택할 능력마저 결여된 존재가 되겠지요. 당신은 엔지니어나 좋아할 기계 같이 정확한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정 원하는 세상은 잃어버릴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의 문제에 있어서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하면서도 심오한 개념에 접근해야 한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렇다면 그 인간의 자유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침해할 수도, 개입할수도 없는 불가침영역인가? 어떤 이들은 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온전한 자유를 선물로 주었기에, 그 자유로 인해 나타난 일들 마저도 그분이 통제하실 수 없는 영역이라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일이 이 세상에 일어났다. 이는 곧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난 일들이 지금도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이며,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주권자가 되지 못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분은 더 이상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니다. 설령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벗어난 사건이 한 두 개 정도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 한 두개의 사건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엄청난 계획들을 단번에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설령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 발현된 사건이라 할지라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움직인다. 이 사실은 그 어떤 것과도 타협될 수 없는 기독교의 진리다. 만약 우리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말이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의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11)"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하나님께서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리고, 성경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완전하신 주권을 인정하는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의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의 악한 선택이 하나님의 선하고 위대한 일로 사용되었음을 고백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세기 50:20)" 요셉의 형들이 한 일들은 순전히 그들의 자유의지로 이뤄진 선택이었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동생을 해치려 했다. 그러나 이 악한 선택 마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허락된 것이었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 이를 신약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또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에 따라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가룟 유다의 배신도, 본디오 빌라도의 사형집행도 이미 일어나기로 예정되어져 있던 일이었다는 것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사도행전 4:27-28)"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는 어려운 질문들이 남아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주관하신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란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들이 결국 하나님이 계획한대로 움직인다면, 우리는 그저 한낱 무의미한 꼭두각시일 뿐이라는 것 아닌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가 이미 확고부동하게 정해진 끔찍한 결정에 얽매여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선택과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예정하심 앞에서 모두 무너지는 것 아닌가? 정말 하나님의 완전하신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공존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완전하신 계획, 그리고 그 아래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어떻게 보면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신화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그는 그에게 내려진 운명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그런 노력과 책략들은 오히려 그의 숙명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다. 어쩌면, 우리도 이러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스스로가 선택을 내린다고 믿지만, 실상은 이미 우리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그리고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까지 모두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 애초에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삶 속에서 의미라는 것을 찾을 수가 있는가?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도 이 둘의 공존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공존하는지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하나의 실체를 지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혹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서 그 실체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서문에서도 분명하게 언급하였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언급하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지식으로 세상의 모든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지적 교만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리란 그렇게 쉽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근본적인 실체는 얻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거기에 접근해 갈 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접근하면 할수록 우리는 자신의 무지를 확인하게 될 뿐이다. 그로써 우리는 새삼 그 신비의 영역 속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거짓의 사람들 pp.65)”
기독교 신앙에서 발견되는 이중성, 즉 전혀 공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두 가지의 특성 내지는 실체가 공존하는 현상은 현실의 과학에서도 비슷하게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어, 빛은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이다. 파동과 입자는 매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파동이기도 하면서 입자이기도 하다는 말은 모순된 표현이다. 아직 우리는 이 특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물리학은 빛이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두가지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신비로운 현상이 ‘실재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 속에서 드러나는 수 많은 이중성들도 이와 비슷한 원리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자유라는 개념에 대하여 그 실체에 비해서는 매우 얕은 정도의 수준이지만 나름 다양한 이야기를 나눠왔으며, 그 끝에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온전히 주도하시지만,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어 자유롭게 행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게 하는 방식으로 그 주도권을 행사하신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와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아무 부대낌 없이 양립할 수 있다.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pp.221)” 성경은 이 신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 신비가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우리가 겪는 고통의 문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그 자유의지 위에는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이끄심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떤 것보다 큰 위로가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온갖 고통들을 극복하게 해주는 동기를 제공해준다. 우리는 모두 실수하고 넘어진다. 끊임없이 실패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려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이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는 아브라함 마저도 그런 삶을 살아가셨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마주한 문제와 우리가 지은 죄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실수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하는 경우의 수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지은 죄 마저도 하나님이 그의 뜻을 성취하시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 약속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만약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그분의 언약이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다면 우리에게는 아주 조금의 희망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로 완전히 잘못된 선택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좌절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패와 시련마저도 그분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 그리고 그분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위해 사용된다. 우리에게 이것보다 더 큰 위로를 주는 약속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내가 이룬 것처럼 보인 것들이 실제로는 나의 힘과 능력을 통한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언약의 성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주도해 나가시는 동시에 우리의 크고 작은 선택에도 분명하게 ‘의미’를 부여하시고 또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부여하심으로써 우리가 그저 하나님이 정하신대로 걸어가는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점을 확증하신다. 창세기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족장 야곱이 살아가며 저지른 죄를 살펴보자.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권리를 빼앗았다. 결국 고향에서 도망쳐 외국 땅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으며 모진 고생을 했다. 하지만 거기서 평생 사랑할 짝을 만났고 자식들을 낳았으며 그 후손 가운데 예수님이 태어났다. 야곱의 죄가 그를 최선이 아닌 플랜 B의 삶으로 몰아넣지 않았다는 건 분명하다. 모두가 그를 향한, 더 나아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이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야곱은 스스로 저지른 죄에 책임을 지지 않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대가로 수없이 많은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어김없이 주관하셨다. 심지어 야곱이 철저하게 대가를 치르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즉, 우리가 겪는 고통의 일부는 우리의 선택으로 인해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일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렇게나 살으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구약성경에 있는 잠언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명령한다. 그리고 그 명령을 지켰을 때 그리고 지키지 않았을 때의 결과마저도 선포한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쳐주시면서 동시에 어리석고 악한 행동의 결과로 고통을 겪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신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개인의 행동이 그가 겪는 고난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과 분명히 연결되며, 동시에 개인의 지혜와 의지를 통해여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정직하게 살아갈수록 그것으로부터 오는 상급이 분명히 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해주시면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모든 크고 작은 행동에 의미가 부여되었음을 알려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