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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을 외워보자, ‘열려라 참깨!’

쿠엔즈버킷 동대문 공장 겸 플래그샵

by 펭소아

● 장소 서울 중구 광희로 233

● 준공 2019년 4월

● 설계 문훈발전소+무유기건축사무소(문훈)



사(肆)라는 한자어가 있다. 공장과 매장이 나눠지기 시작한 산업혁명 이전 제품을 만드는 공방과 그것을 판매하는 가게를 겸한 공간을 지칭한다. 책방을 뜻하는 책사(冊肆)나 화가들의 그림을 파는 도화사(圖畵肆)라는 옛말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는 ‘논어’에서 “군자가 배움을 통해 도를 닦을 때는 백공(百工)이 사(肆)에서 생활하며 그 공예품 완성에 최선을 다하는 것과 같아야 한다”고 말했다. 장인들이 공예품 완성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듯 깨달음을 추구해야 한다는 이 표현에서 ‘인격을 도야(陶冶)한다’는 표현이 유래했다. 도(陶)는 도자를 빚는 것이요, 야(冶)는 쇠를 주조하는 것을 뜻하니 장인이 도자를 빚고 쇠를 주조할 때 지극 정성을 기울이듯 인격수양에 나서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그 이름에 사(肆)가 안 들어갔을 뿐 그런 공간을 우리 일상에서 쉬이 찾아볼 수 있었으니 대장간, 목공소 그리고 방앗간이 그에 해당한다. 요즘은 서울 시내에선 찾기 힘든 그 방앗간을 도심 속에 현대적 건축으로 지었다는 말을 듣고 슬쩍 웃음이 났다. 그것도 쌀을 찧는 정미소도 아니고 참기름을 짜는 방앗간이라니. 시골서 올라온 참깨들이 그곳에서 황금빛 기름으로 도야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고소한 땀내를 풍길 것인가.



불탑 같고 돌탑 같은 ‘도심 속 방앗간’



사진1_메인 후보 쿠엔즈버킷 동대문 공장 겸 플래그샵 ⓒ포스트픽.jpg 쿠엔즈버킷 동대문 공장 겸 플래그샵 ⓒ포스트픽


2019년 4월 2일 호기심에 문제의 방앗간을 찾아 나섰다. 서울 중구 광희동 사거리 도로변에선 보이지도 않았다. 사거리에서 퇴계로를 따라 15층짜리 이비스 버젯 앰배서더 동대문 호텔을 가기 전 옆 골목으로 들어서니 다세대주택들 틈새로 노출 콘크리트로 지어진 탑 모양 건축이 삐죽 보였다.


엉? 저게 방앗간이라고? 주택 사이로 난 더 좁은 골목길을 통해 더 가까이 다가서 봤더니 항구의 등대 같기도 하고 공항의 관제탑 같기도 했다. 주택가에 들어서기엔 확실히 이질적 건축이었다. 하지만 겉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한국의 옛 마을 어귀 서낭당 앞에 쌓아놓은 돌탑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4월 4일 준공식을 연 스타트업체 쿠엔즈버킷의 동대문 도심 공장 겸 플래그샵이었다. 2013년 창업된 쿠엔즈버킷은 한국 고유의 참기름과 들기름을 올리브유에 필적할 고급 향신료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보통의 방앗간은 참깨나 들깨를 고온 압착으로 추출해 참기름과 들기름을 만든다. 반면 쿠엔즈버킷은 저온압착이나 냉압착으로 기름을 추출해 다른 식재료를 압도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은은한 참기름과 들기름의 세계화에 도전 중이다.


“맷돌에게 깨를 갈아 추출한 전통적 참기름은 진하고 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1960년대 일본에서 착유기를 들여오면서 기름 추출량을 늘리고자 깨를 고온으로 볶고 강하게 압착하게 됐습니다. 현재 전국 1만 2000여 개의 방앗간이 이런 고온압축 방식으로 참기름을 생산하다 보니 참기름 하면 향과 맛이 강한 기름으로 각인됐습니다. 저희는 1년여 동안에 거친 실험을 통해 참기름의 전통적 맛과 향을 살리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한 기술을 찾아냈습니다.”


박정용 쿠엔즈버킷 대표의 설명이다. 이후 국내 유수의 음식점에서 쿠엔즈버킷 참기름을 쓰면서 ‘프리미엄 참기름’으로 입소문 났고 국내 주요 백화점은 물론 홍콩과 뉴욕의 유명 식품점과 레스토랑에 납품하게 됐다. 그 회사명이 특이했다. 쿠엔즈버킷의 영어표기는 queensbucket이다. queens는 이 회사의 모토인 ‘Qualified Utility Enhances Everyone's Need Satisfied(최적화한 유용성이 모든 사람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을 강화한다)’의 약자다. 그 뜻을 차별화하기 위해 ‘퀸즈’가 아니라 ‘쿠엔즈’로 발음하게 됐다. bucket은 자신들이 만든 참기름, 들기름을 받아놓는 들통을 뜻했다.


사진4_1층 플래그숍. 쿠엔즈버킷이 제조하는 53종의 참깨, 들깨, 마늘 제품이 높다란 선반 위에 층층이 전시돼 있다..jpg 1층 플래그숍. 쿠엔즈버킷이 제조하는 53종의 참깨, 들깨, 마늘 제품이 높다란 선반 위에 층층이 전시돼 있다.



다섯 겹의 들통과 오층 석탑



사진5_1층 플래그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출입구와 대각선 지점에 위치한다. ⓒ포스트픽.jpg 사진5_1층 플래그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출입구와 대각선 지점에 위치한다. ⓒ포스트픽


그런 설명을 듣고 나니 건축의 비밀이 풀렸다. 불탑이나 돌탑처럼 여겨졌던 것이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들통(버킷)을 겹겹이 쌓아놓은 형상이었다. 선별된 깨를 씻고(와싱), 볶고(로스팅), 압착(프레싱)해 추출한 기름을 세 차례에 걸쳐 걸러내고(필터링) 최종 병입하기(보틀링)까지 과정에 빠질 수 없는 용기와 탱크를 들통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최대 면적 5.8m×5.6m의 협소한 공간에 재료 창고(지하 1, 2층)와 플래그샵(지상 1층), 공장(지상 2, 3층), 쿠킹 체험장(지상 4층)을 밀집시키면서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게 하기 위한 구성이기도 했다. 바닥은 좁아도 천정이 넓고 다양한 채광창을 설치해 환하고 널찍한 느낌이 든다.


실제 1층 플래그샵에 들어서면 위로 갈수록 공간이 넓어져 그렇게 좁아 보이질 않는다. 이 샵에는 쿠엔즈버킷의 오일 제품 26종과 선물세트 15종, 과자류 10종, 화장용 2종이 높은 선반 위로 쭉 전시돼 있다. 평면 면적은 좁은 대신 위로 갈수록 넓어지는 공간감을 살리기 위한 수직적 공간배치다. 또 1층 출입구를 모서리에 만들면서 기계식 슬라이딩 도어를 양면에 설치해 양문을 모두 열면 확장감이 더 커진다. 그래서 출입구 대각선 맞은편에 위치한 내부 계단 위에 서서 1층을 내려다보면 뮤직홀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


설계를 맡은 문훈발전소의 문훈 소장은 “원래 음성인식을 통해 ‘열려라 참깨!’를 외치면 양면 슬라이딩 도어가 쫙 열리도록 구상했었다”면서 껄껄 웃었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작지만 엄청난 영양분과 기름을 함유한 참깨 같은 건축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진3_양면 여닫이 슬라이딩 도어로 된 출입구. 꼭짓점과 꼭짓점을 잇는 기하학적 사선이 역동적 공간을 만든다는 문훈의 건축미학이 반영돼 있다. ⓒ포스트픽.jpg 양면 여닫이 슬라이딩 도어로 된 출입구. 꼭짓점과 꼭짓점을 잇는 기하학적 사선이 역동적 공간을 만든다는 문훈의 건축미학이 반영돼 있다. ⓒ포스트픽

노지심과 동자승의 우정


사진8-4층 쿠킹체험장. 대형창이 벽면에 설치돼 햇살이 눈부시다..jpg 4층 쿠킹체험장. 대형창이 벽면에 설치돼 햇살이 눈부시다. ⓒ포스트픽

실제 2, 3층으로 올라가면 지하저장고에 보관된 깨를 엘리베이터로 옮겨 씻고 볶고 압착해 기름을 만드는 장비가 다 갖춰져 있다. 이곳에서 하루 얼추 1000병 분량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하니 방앗간이라기보다 공장이라는 표현이 맞다. 4층에는 전문 셰프의 지도 아래 참기름과 들기름으로 조리가 가능한 우아한 쿠킹 체험장이 마련돼 있다. 이곳은 특히 밝고 환한 채광창이 인상적이다. 게다가 5층에 해당하는 옥상 공간까지 함께 활용할 수 있어 비좁다는 느낌이 상쇄된다. 4층짜리 건물이지만 쌓아놓은 버킷의 숫자가 다섯 개인 이유다. 거기엔 뜻밖의 이유가 하나 더 숨어 있었다.


“박 대표는 군대에서 사귄 친구입니다. 제가 이등병일 때 병장이었지만 동갑(1968년생)이란 걸 안 뒤 늦깎이로 입대한 저를 많이 챙겨준 고마운 친구였죠. 그런데 ‘도심 속 방앗간’을 짓겠다며 설계를 의뢰하더군요. 좁은 공간을 널찍하게 활용하기 위해 다섯 개의 버킷이 겹쳐진 형태를 구상했습니다. 거기엔 제가 간직해온 박 대표에 대한 이미지도 투영돼 있습니다. 맑은 성품에 단아한 박 대표를 볼 때마다 동자승을 떠올렸거든요. 그래서 우리 전통 건축의 오층 석탑 형식을 접목시킨 겁니다.”


거기엔 그렇게 노지심처럼 호방한 문훈 소장과 동자승처럼 수줍게 웃는 박정용 대표의 남다른 우정이 농축돼 있었다. 도야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두 공인(工人)은 인생의 도반(道伴)이기도 했다.


사진6축_지하1층의 손님맞이 방. ⓒ포스트픽.jpg 지하1층의 손님맞이 방. ⓒ포스트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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