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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우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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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Dec 04. 2024

우희와 건희 사이

2024년 12월 4일(맑고 추움)

오기는 산을 뽑을 듯했고, 주먹은 허공을 갈랐네

때가 불리하니 동훈마가 달리지 않는구나

동훈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이할꼬?

건희야, 건희야 너를 어이할꼬?



초패왕 항우의 절명시를 빌려 지난 밤 윤통의 심정을 우민은 이렇게 읊어봤다  역발산기개세를 자랑하며  "내가 제일 잘 나가"만 불러대던 항우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리자 애마였던 오추마와 총애하던 우희의 이름을 부르며 이 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수록된 '해하가(垓下歌)'라는 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해하는 초나라와 한나라 최후의 격전지 지명이다.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한데(力拔山兮氣蓋世)

시세가 불리하니 오추마는 나아가지 않는구나(時不利兮騅不逝)

오추마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할꼬(騅不逝兮可奈何)

우희야, 우희야, 너를 어찌할꼬(虞兮虞兮奈若何)


"정치는 가능성의 기예"라는 말이 있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남긴 말이다. 독일어 원문으로 Politik ist die Kunst des Möglichen다. Kunst는 영어 Art에 해당하는데 기예와 예술이라는 의미가 함께 담겼다. 특화된 기예를 예술로 부르는 것이기에 기예로 번역하는 게 적확하다는 게 우민의 생각이다.


윤통은 비스마르크의 통찰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최악의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까라고 우민은 생각했다. 흔히 정치인을 두 갈래로 나눠볼 때가 많다. 비늘 없는 낚시로 세월을 낚는 인동초 정치인과 승부사 기질의 정치인이다. 윤통은 후자고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제대로 훈려받은 정치인이라면 둘을 모두 겸비해야 한다고 우민은 생각한다. 평소엔 느릿느릿하다가 기회가 왔을 때 전광석화처럼 움직여야 한다. 그걸 표현한 사자성어가 호시우보(虎視牛步)다. 평소엔 소처럼 느릿느릿 걷지만 기회가 열리는 카이로스의 순간을 낚아채기 위해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는 뜻이다.


항우가 유방에게 패배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항우는 평생 스스로를 호랑이라 생각하면서 '모 아니면 도'의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인내력이 부족했기에 위기가 닥치자 일말의 가능성을 기다리며 후일을 도모하기 보다 자멸의 길을 택했다. 반면 유방은 인동초와 승부사를 겸비했기에 가능성의 시간으로서 카이로스가 열릴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고, 카이로스가 열리는 순간 잽싸게 행운의 여신을 낚아 챌 줄 알았다.


비스마르크를 항우와 비슷한 승부사로 보기 쉽다. 자부심 가득한데다 몰트케와 같은 명장을 통해 독일통일과 보불전쟁의 승리를 쟁취한 군사적 귀재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동시에 독일 내부의 진보적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사회보장정책을 도입할 줄도 알았고 카이저 빌헬름 2세의 폭주를 억제할 줄도 알았다. 그런 비스마르크의 진가를 간과했기에 독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의 멍에를 짊어지게 됐다는 게 우민의 판단이다.


윤통에게 대통령이 될 카이로스의 시간이 왔을 때 이를 잽까게 낚아챈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호랑이의 눈을 지녀서가 아니라 탐욕으로 물든 이리와 늑대의 눈깔을 지녔기 때문이었음을 지난밤의 해프닝이 여실히 입증했다. 


기대했던 일이 뜻밖에 수포로 돌아갔을 때 낭패를 겪는다는 표현을 쓴다. 여기서 낭패(狼狽)는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은 이리(狼)와 반대로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긴 이리(狽)가 만나면 조금만 어긋나도 사냥이 수포로 돌아간다 해서 생긴 단어다.


우보의 인내력을 갖추지 못한데다 호시의 통찰력도 갖추지 못한 최악의 정치인이 어쩌다 운이 좋아 대통령 자리까지 오르는 바람에 개인적으론 패가망신하게 됐고, 국가적 재앙이 되고 말았다. 이런 낭패가 또 있으려나며 우민은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민은 '어리석은 백성(愚民)'이자 '근심하는 백성(憂民)'인 동시에 '또 하나의 백성(又民)'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제 자신에게 붙인 별호입니다. 우민일기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운 '맨스플레인'에서 벗어나보자는 생각에 제 자신을 3인칭으로 객관화하려는 글쓰기 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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