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주.
파란 하늘이 끝도 없이 높아서. 가지마다 흔들리는 잎이 너무 고와서. 가을바람에 마음이 수런거려서.
여러 이유들로 훌쩍 출발했다. 경주로.
하지만 내가 누구? 나는 자타공인 날씨의 여왕!
매일 화창하던 날씨가 내가 방문하는 기간 동안만 비 예보가 떴다. 그리고 도착한 경주는 역시나 가을비가 내린다. '비 내리는 가을의 경주라니! 분명 해가 쨍한 날보다 더 좋을 거야.'
불쑥 올라오는 날씨에 대한 반발을 꾹꾹 눌러주며 대릉원으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들어서자마자, "우와!"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지더니 소리가 뱉어진다.
바로 앞에서, 옆에서, 높은 봉분들이 날 내려다본다. 거대하지만 크기가 제각각인 봉분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 들어가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다. 규모에 압도되거나 경건한 분위기에 발걸음도 조심하게 되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다른 장소에 뚝 떨어진 듯 묘한 고립감. 평화로운 동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것처럼 기분 좋은 고립감이 든다. 그래서일까?
"형아, 이 무덤은 할아버지 무덤의 몇 배나 될까?"
옆에서 들리는 아이다운 대화에 확 옅어지는 고립감을 느끼기 전까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구불구불 다시 걷는다.
내 주먹 두 개는 합해야 얼추 비슷할 것 같은 튼실한 모과들이 주렁주렁 열린 모과나무.
유독 알이 큰 새빨간 산수유.
잘 익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땅에 떨어져 뭉그러진 홍시들.
이 묘한 공간에 가을의 풍성함이 더해져 색깔을 입히고 시간을 쌓아간다. 천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그런 것처럼.
멀리서도 시선을 돌리기만 하면 보이는 이 높은 봉분들은 당시 신라 사람들에겐 경외의 대상이었을 거다.
지금 나에겐 머나먼 과거의 어느 순간들을 상상해 보는 호기심의 대상이고.
몇 바퀴를 천천히 걸으며 미로에서 길을 찾듯 역사 속 어느 순간들을 뒤적여본다.
황남대총 앞에서. 천마총 앞에서.
눈부신 유물들을 간직했던 무덤의 주인공들을 상상해 본다.
30년도 더 지난 어린 시절. 천마총 앞에서 찍은 수학여행 사진엔 친구들 얼굴과 '천마총' 세 글자만 남아있다.
그 사진 뒤에 잊고 있던 진짜 대릉원을 오늘 다시 만나는 기분이다.
걷고 멈추고.
한 바퀴, 두 바퀴. 돌고 또 돌고.
비에 젖은 벤치 탓하며 느리지만 쉼 없이 걸어보는 길.
'어때? 나 이런 사람이야.'
거대한 봉분들이 말을 걸어온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출구는 알지만 빠져나갈 생각이 없는 자발적 미로 속을 한참을 더 헤매어 본다.
그런 내 걸음마다 신라가 폴폴 피어오른다.
경주라는 이상한 나라의 첫걸음. 대릉원.
과거를 걸어보기 참 좋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