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주.
자고 일어나니 비가 그쳤다.
특별한 향기를 품은 절을 방문할 예정인 오늘 일정에 딱 맞는 아주 좋은 날씨다.
향기 '분', 황제 '황'.
황제의 향기를, 황제의 뜻을 신라 전체에 전하고 싶었던 선덕여왕의 의지가 담긴 곳. 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받은 절은 어떤 향기를 담고 있을지 궁금해 걸음이 빨라진다.
분황사에 들어서자마자 처음으로 와닿은 바람은 고즈넉함이다.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방문객이 우리 밖에 없다. 비 온 뒤의 청명한 공기 사이로 총총거리며 먹이를 찾는 까치와 가지에서 떨어지는 낙엽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은 고요함.
그 안에 저벅이는 내 발소리가 더해지며 분황사의 아침을 깨운다.
'아, 심신이 안정되는 이 느낌! 이게 고즈넉함 테라피지!'
절로 가벼워지는 몸을 느끼며 고개를 돌리면 두 번째 바람이 와닿는다. 거대한 묵직함이 쏟아져 들어온다.
바로 그 유명한 '분황사 모전석탑'이다.
비는 그쳤지만 물기를 머금고 군데군데 색이 짙어진 석탑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긴다. 굳건히 서 있는 석탑에선 어떤 '기백'마저 느껴진다.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태산 같은 무게감의 장수를 맞닥뜨린 기분이랄까.
석탑 주위를 천천히 걸어본다. 이 기백의 정체를 밝혀보리라!
모전석탑은 일반적인 석탑과 달리 돌을 벽돌 모양으로 하나하나 다듬어 쌓아 올렸다. 요즘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작은 벽돌들을 층층이 쌓아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벽돌 하나하나 같은 듯 다르다. 빵틀에서 찍어낸 듯 똑같은 게 아니라 1400년 전 신라의 석공들이 하나하나 쪼개고 다듬은, 크기와 두께가 다양한 벽돌들이 모여 하나인 '척'하고 있다. 서로 다른 것들이 똘똘 뭉쳐 하나를 이루어 만들어 낸 기운인가?
그렇다면 이 기백이 말이 될 것 같다. 인정!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있지만 원래는 7층이나 9층이었을 걸로 추정된다고 하니 원래의 모전석탑을 마주하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면서도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지은 죄도 없이 부실한 무릎이 떨려올 것 같은 느낌이라 사양하고 싶다.
옛 영화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남아 있는 석탑만으로도 분황사의 과거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곳.
왕의 의지를 천명한 절의 이름처럼 1400년 전 신라사람들이 우러러보고 마음을 기대었을 곳.
그 향기가 오늘까지 남아 내게도 심신의 안정과 여러 영감을 주는 곳.
경주라는 이상한 나라의 네 번째 걸음에서, 우아하고 아름답지만 압도적 기백을 뿜는 향기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