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산행
신이 있다면, 그리고 그 신이 나를 세상에 보낸 이유가 있다면,
나라는 존재가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지, 순간의 행복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보낸 것 같다.
최근 엄마가 암 진단을 받았다. 엄마는 며칠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나씩 이뤄가던 엄마의 꿈들이 한 번에 무너졌다. 그 사실이 더 힘들게 했고, 옆에서 지켜보는 나조차도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보다 꿈이 무너져 좌절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더 가슴 아팠다.
다행히 조기에 발견되어 치료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확보되었지만, 그래도 죽음과 가까운 병에 걸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소 큰 충격을 받았다. 조기에 발견돼서 다행이라고, 완치율이 높은 착한 암이라고 모든 말로 위로를 했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그 좌절과 우울을 가늠할 수 없다. 나 역시도 우리 엄마가 암에 걸렸을 리는 없다며 며칠을 부정했다.
엄마가 암 진단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조기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치료만 잘 받으면 완치될 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전화 몇 번으로 엄마의 상황을 넘겨짚었다. 가족과 떨어져서 살면 전화 수화기 너머 들리는 미세한 차이에 촉을 세우지 않는 이상 별일 없다고, 괜찮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때마침 일터에서도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매일 야근을 했기 때문에 엄마의 슬픔에 공감할, 그리고 그 현실을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이 부족했다. 그렇게 나의 우선순위에서 엄마를 밀어냈다.
그러다 며칠 후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하루 종일 울고만 있다고. 집에 와서 잠깐이라도 말동무가 되어줄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바쁜 거냐고 다소 실망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챘고, 단단히도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를 품어주던 거대한 엄마는 이제 작고 연약해졌다. 나를 굳건히도 보호해 주던 세계가 땅밑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그 이후로는 엄마의 기분전환을 위한 꽃다발을 사들고 시간을 내어 집에 내려가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또 평소보다도 더 자주 전화해 오늘 저녁으로 뭘 먹었는지 물었다. 내가 잘못 선택한 것에 대해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엄마가 나를 보살피던 그 사랑의 마음을 흉내 내며 어리숙한 표현으로.
그렇게 몇 달이 지나 비가 수북이 내리던 날 아침, 엄마로부터 비 오는 산행길의 영상과 함께 문자가 왔다.
“엄마는 오늘 비가 와도 이렇게 걸을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행복해. 지아가 엄마를 생각해 줘서 기쁘고 고마워.”
그 문자를 보고 벅찬 감정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깊고 어두운 수렁에서 빠져나와 반짝이는 기운으로 단장한 엄마의 모습에 크나큰 안도감을 느꼈다. 그 안도감에는 감사의 의미가 더 컸다. 방향성이 없는 감사였다. 그저 엄마와 나를 둘러싼 지금 이 순간, 이 현실을 마주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느꼈다.
사실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겠다. 깊은 사랑으로 행복을 나누며 감사할 줄 아는 것. 이것 하나만이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주는 유일한 목적이자 목표가 아닐까 생각하며, 엄마가 보낸 산행 영상 속 엄마의 자박한 발소리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