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이상스 Jun 04. 2021

낙천주의를 가장한 비관주의

낙관주의란

낙천 : 세상을 즐겁고 이로운 것으로 여김.
낙관 : 인생 혹은 사건, 사물을 희망적으로 봄.
 
 언뜻 동일한 말 같지만 낙천주의와 낙관주의는 실상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우선적 판단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늘 아래 모든 것들은 최선이며, 하여 나쁠 이유가 없다. 현황을 이미 최종적으로 선한 것으로 결론 지어놓고 고민하기를 그친다. 편하다. 안정적이다. 편하고 안정적인 정답이 이미 내려져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될 것이다, 그리 믿는다. 낙천주의는 믿음에 가깝다. 맹목적 신념. 좋은 일들이 저절로 올 텐데 고민해서 무엇하리. 좌표는 정해져 있고 내가 그 좌표로 달려갈 필요도 없다. 좋은 일은 좋은 일이었고 앞으로도 좋은 일인 게 분명해서 저절로 나에게 향할 것이다, 그리 믿는다. 우선 판단이 내려지면 그 판단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후속 조치는 따라오지 않는다. 실행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아도 행복은 '앞으로' 올 것이 확실하다. 하늘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 판단한다. 
 
 어쨌든 괜찮아.
 괜찮아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 결국 하무 행동도 하지 않고 따라서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낙천주의자에게 행복이란 언제나 늘 한 발 앞서 있다. 곧 낙원이 펼쳐지겠지. 
 
 당연히
 
 낙원은 도래하지 않는다. 현실은 낙원이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에겐 일말의 열매도 허락하지 않는다. 현실은 깐깐하고 깜깜하고 냉혹하며 공정하지 않지만 때론 무섭도록 공정하다. 
 

 비관주의보다야 낙천주의가 낫지 않을까. 
 
 과연
 
 그럴까.
 
 비관주의적인 태도는 용기를 잃었을 때 나타난다. 현실은 아무리 해도 바뀔 수 없다며 포기하는 태도다. 그런 비관주의 역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낙천주의와 마찬가지로 현실을 바꿀 수 없다. 그래서 아들러는 사람이 모든 상황에서 낙천적이면 그 사람은 틀립없이 비관주의자가 된다고 지적했다.

 “낙천적인 사람은 패배에 직면해도 놀라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지독한 비관주의자가 겉으로는 낙천주의자처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알프레드 아들러.”.
 
 


낙관주의란


 즐거움을 먼저 '관찰'해야 한다. 판단하기 이전에 멀리 떨어져서 뭉뚱그려져 있는 희망을 세밀하게 찾아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그리고 왜 희망적인가 고민해야 한다. 희망에 실체를 입혀야 한다. 
 
 그리고
 
 그 희망을 향해 내가 움직여야 한다.
 아주 작은 것부터 아주 코앞부터 희망을 클리어해야 한다. 인생이라는 게임의 룰 안에서 아주 진지하게....
 
 항상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바로 그런 현실에서 출발해야 희망을 관찰할 수 있다. 희망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움직일 수 있고 움직여야 닥쳐오는 암담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다. 
 
 심각하다는 것과 진지하다는 것은 매우 다르다. 인생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진지해야 한다. 마치. 트럼프 게임처럼. 트럼프 게임을 할 때 "미안, 지금 이번 판은 없었던 걸로 하고 다시 하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게임이 재미없어진다. 진지하게 게임에 임해야 한다. 하지만 트럼프 게임에 졌다고 죽지는 않는다. 심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니
 회피하지 말자. 회피한 그곳이 평화롭다고 믿고 싶겠지만 그러한 맹신이 두터워질수록 현실과 이데아의 경계만 견고해질 뿐이다. 문득 돌아온 현실이 너무 비좁아졌을 때 한없이 외롭고 무섭고... 그래서 영영 행복을 '앞'에만 두고 살고 싶지는 않잖아. 
 
 세상은 누군가를 위해 룰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싸우지 않고 행복해질 수없다. 행복 바로 뒤에는 지독한 고통만 있을 뿐.

작가의 이전글 우물쭈물 할 것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