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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상스 Jul 06. 2021

관념 의존증 : 아마(maybe) 존(zone)의 실체



  관념을 사랑하는 게 죌까. 그럴 리가 없다. 관념이 없었으면 문명은 없었을 테다. 그렇다. 관념은 아무 잘못이 없다. 관념을 만들어 낸 것은 우리니까.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숨는 곳. 그것이 관념이다. 만만하고, 익숙하고, 효율적이고, 빛의 속도처럼 빠르며, 우리에게 안식을 주는 것. 

알아야 할 게 있다. 우리는 ‘베스트 프렌드’ 그 녀석에게 그 언젠가 배신당할 것이다.

우주를 포용하는 척, 그러나 실상 빈 상자일 뿐, 아무것도 없는 것이 관념이다. 해서, 배신당해도 왜, 누구에게, 배신당했는지 알지 못한다. 찾지 못한다. 빈 상자를 흔들어대면 아무 소리도 나질 않기에. ‘비어있음’을 감지할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관념은 우리가 감각할 수 없도록 부러 만들어진 부적이다. 홀로그램보다 치밀하며, 더 리얼해서, 관념의 빈 상자를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세상은 지나갔고, 언어는 문신처럼 새겨진 마음속 각인. 그래서 우리는 말한다. 언어는 약속, 말씀하시길, 가라사대, 말하면, 이해한다. 그렇게 착각한다. 

사랑해, 

  라는 단어를 읊조릴 때.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우주를 사랑한다. 그러나 ‘사랑’ 속에 담긴 무한함은 절대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관념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 보이지만 선택된 대상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지운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장미 꽃다발을 내미는 두 손, 그 맥락 속에서의 사랑은 다른 가능성, 예를 들면, 증오, 들끓는 주전자, 기찻길 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혀, 귀, 눈, 휘날리는 핏빛 꽃들, 벽과 벽 사이, 그 안의 굳건한 담벼락, 울타리, 철망, 전기 충격과 같은 고통, 콧노래를 부르며 칼날을 가는 소리, 사냥하다, 사냥당하다 사이에서 택배 상자를 이 악물고 부욱, 찢는 표정, 그 내용물에서 잠시 반짝이는 북극성, 낙하산 없이 추락하는 기분, 침대 위에서, 오염된 거품을 오열로 토해내는 소리, 꽃다발을 거꾸로 매달고 구정물 분무기로, 분한 마음을 삭히며, 썩어가는 거꾸로 꽃다발, 빨간 장미꽃의 굳은 핏덩이, 그 속에 알알이 피어나는 구더기 꽃……. 그따위가 사랑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아는데, 사실 몰랐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단지 선택했을 뿐이다. 


관념의 무한함은 언제나 우리를 비웃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관념을 사랑한다. 

관념이란, 다시금 돌아와서, 

이 얼마나 안락한가.


  이별이란 정서를 우리는 잘 안다고 생각한다. 첫 이별, 그러나 우리는 이별을 학습한 적이 있다. 어디서? 그러니까 말이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야 할지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안녕, 고정관념.

  사실 우린 만난 적이 있단다. 

  분명히 처음인데, 이 기시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형용을 우리는 감히 쓸 수 있는가. 천만에. 세계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치면 우리는 벌벌 떨면서, 금단 증상에 걸린 약쟁이처럼 관념을 입에 털어 넣는다. 슬, 프, 다. 슬프다. 슬프다. 슬프다. 슬프다. 슬프다.

  다시, 슬, 프, 다.

 움직이고 미끄러지는 감정들의 사지를 잘라 박스 안에 고이 접어 넣으면 ‘슬픔!’ 하고 입을 다물게 되는데, 우리는 편안하게 나머지를 배제할 수 있으며, 무의식 저편으로 구겨 처넣어 세계 바깥으로 밀어낼 수 있다.

  사실 솟구치는 감정에 말을 붙여 뭐하겠는가. 

  그리움과 해소감이 섞여서 가라앉았다가 놀라서 펄떡 뛰는 고양감에 젖었다가 멍하니 더 멍하니 있게 되는 마음, 그런 마음이 곧 가슴을 짓누르고 압박감이 들었다가 무기력감이 몰려오더니 다시 퍼뜩, 각오를 다지고 멍하니 올려 둔 커피 물을 태워 먹고, 졸리다가 무섭다가, 아니, 많이 무섭지 않고, 아니, 낮게 깔린,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무서움이 주르륵, 눈물로 흐르다가, 내일에 대한 두려움, 불안이 아니라 두려움, 반드시 알 것 같은, 두려움과 막간의 거짓 웃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는 게 없어, 현실에 없는 정신이, 꿈결 같은데 어디선가 비가 내리는데 샤워기를 들고 있고, 좀 더 울어야겠다는 오기와 원망과 거울을 보는 혐오와, 잠시, 현기증, 거짓말이어야 할 것 같은 마음, 그 거짓말은 차라리 행복해 보여서, 뜨거운 우울, 머리가 눈가가 언제나 뜨겁고 손발은 차고 마음은 뜨겁다가 차다, 그런 말이 없으니까 뜨겁차다, 뭐 이런 그지 같은 마음이 다 있냐는 생각, 어이없어, 어처구니없어, 그러다가 편해, 이 감정 뭔 말인지 알지?

  들어보라. 얼마나 부질없는지. 뭔 말인지 알긴 쥐뿔이다. 

  언어는 추상의 세계를 약속했다. 우리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그쯤은 각오했다. 이왕이면 상위개념이 더 좋다. 더 많이 포괄할수록 정보전달은 효율성을 얻는다.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구구절절한 시간을 압축시킬 수 있다. 언어가 탄생한 이유다. 관념은 심플함이 생명이다. 거기에 상충하는 관념을 덕지덕지 이어붙이면 관념의 목적이 사라지고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관념은 무한함을 배제함으로써 태생적으로 이분법적이기에 ‘불안하지만 사실 상쾌해’ 같은 말은 이분법적 세계 속의 이단 같은 존재이며 이해해서는 안 되는 말이기도 하다. 

  관념을 신봉하면서부터 마음속 무한한 감정은 선택을 강요받으며, 언어의 세계 안에 갇힌 이상 우리 안의 방어기제는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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