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 I insightful enough to be a critic?
서로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열 명의 낯선 사람들이 101일동안 101가지의 질문에 답합니다. 노드를 연결하고 세계를 넓혀가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 프로젝트는 제법 사적인 형태로 시작되었지만, 우리만 보기 아까워 1010개의 답변 가운데 일부만을 브런치에 연재해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모임의 마지막 날에는 잔치라도 열어야 할 것 같아요. 읽어주시는 분들도 우리의 즐거움을 느껴주시기 바라며.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평론 활동을 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냥 학생으로 패싱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 첫째로는 등단제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고, 둘째로는 평론 활동으로 생계가 가능할 만큼의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일 테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한 근거는 아니다.
나는 때때로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대안 평론가”. 등단제만으로 유용되는 영화계의 인력풀이 문제적이라고 말했더니, 평론가가 아니라 대안 평론가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안이 되겠다 자처한 적도 없지만, 그들이 내어주는 대안의 자리는 어쨌든 공고한 내부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어떤 곳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관행에 순응하지 않는 자는 결국 “IN”될 수 없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게다가 활동으로 얻는 수입은 거의 무의미하다. 많으면 20만 원, 대개는 10만 원 내외의 원고료를 받고 글을 쓴다. 한 달에 아무리 많은 원고 청탁을 받아도 수입은 50만 원 내외다. 직접 발행하는 비평지는 그 누구의 지원도 받지 않고 발행인들이 각자 대출을 내서 겨우겨우 제작비를 마련하는 형국이다. (덕분에 내 신용등급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생계를 위해 나는 언제나 부업을 하고 있다. 사무보조원, 방과후 코딩 강사, 입시과외, 계약직 작가 같은. 그래서 나는 결국 '직업인'이 아닌 것일까? 나는 영화와 영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움직이는 상들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가장 기껍다. 이 일이 꼭 필요하다고 느끼고, 또 여기에 내가 적합한 인력일 수 있다고 믿는다.
몇 년 전 고등학교 동창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친구가 나에게 웹소설을 주수입 삼아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문학은 건드려 본 적도 없고 아예 재능이 없다고 웃어넘기려 했지만 친구는 정말 진지했다. 상세한 조언이었다. 그 날 집에 돌아와서 웹소설이 뭐고 어떤 게 인기 있고 수익구조는 어떻게 되는지를 찾아봤다. 역시 난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웹소설 사이트 상위 랭크 중에서는 소설 말고도 일기나 에세이를 써서 인기 작가가 된 사람들도 있었고 하이쿠처럼 한 줄씩만 써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런 일로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다. 몇 년 전에 장난처럼 썼던 연애소설들을 조금 고쳐서 올려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말았다. 친구가 웹소설 얘기를 한 것은 분명 내가 영화만 갖고는 먹고살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 언젠가 술을 먹고 가까운 미래에 대한 겁을 소리 내서 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날 모인 친구들은 나를 포함해서 모두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상태였고 대개의 경우 취업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각자 알아서 조심하는 편이었는데 그 날은 왜인지 계속 그 주제로 술자리가 이어졌다. 친구는 초봉에 대한 기준치 때문에 자신의 취업이 늦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고, 나는 이미 취업준비를 하던 차에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 만큼 이미 어느 정도의 각오는 되어 있다고 얘기했다. 이걸로 먹고살기 힘들어서 투잡을 뛰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최소한 필드 내에 악착같이 발은 붙이고 있고 싶다고 했다. 동시에 그렇게 된다 해도 본업은 영화임을 확실히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유난을 떠는 것 같기도 하고 쓸데없이 진지해지는 것 같아 사실 조금 부끄러웠으나 그렇다고 해서 돌려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영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되건 영화의 헥타르를 벗어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만나는 사람들도, 일도, 여가도,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농담들조차도 영화의 범위 내에 있었으면 한다.
(언젠가 얘기할 일이 있겠지만) 통영에서 보냈던 엽서를 받았을 때, 내가 선언처럼 스스로에게 했던 말들이 현실이 되었을 때 느꼈던 흥분을 그대로 기억한다.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영화를 경험하는 것은 내 앞에 투사된 미래의 지점들에 무작위로 엽서를 발송하는 것과 같다. 지금 나는 앞서 말했던 강렬한 정동들과의 재회를 기다리면서, 또 계속해서 영화를 보고 새로운 정동의 잠재태들을 만들어 가면서 살게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어쩌면 영화를 지나치게 낭만화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낭만이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이끄는 동력이라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다. 즉 나에게 영화란 나와 나의 생활과 사유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절대적인 준거 범주다.
나는 영화를 천직으로 여기는 데 주저함이 없다. 하지만 당장 지금도 머니잡을 구하기 위해 매일 NCS 문제집을 풀고 어학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때때로 깊은 회의감이 몰려온다. 나는 천직을 찾고도 직업을 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천직은 천직이 아닌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