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아이
스무 살이 되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물론 법적으로 성인의 위치에서 국가가 부여하는 권리와 의무가 주어지며, 본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어야 하는 사회적 책무를 가지게 된다. 당시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대통령, 지방선거 등 참정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나는 비로소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인들과 술자리에서는 밤새 국가의 미래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이어갔고, 현 정권의 국내외 모든 활동에 대한 토론을 일삼으며 나름적인 잣대로 그들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시대에 깨어있는 청년이 되기 위해 이런저런 책들과 다양한 사상들을 접하며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인생의 진리에 궁금증을 품으며 여러 가지 종교에서 진리란 무엇일까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노력을 했다. 그 당시 잡다한 신념들이 하나둘 자리 잡히기 시작했고, 내가 꿈꾸는 세상은 쉽게 오지 않으며 스스로 쟁취하지 않으면 이룰 수 있는 게 없다는 판단으로 매사에 날이 곤두 선 전투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지금 돌아보면 철없는 망아지처럼 날뛰던 시절이었고, 쓸데없는 곳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투자했던 것 같아 스스로가 부끄러울 때가 있지만, 뭐 어렸으니까 그럴 수도 있었다고 작게나마 위안을 해본다.
이렇게 어른인 척하던 시절에는 세상에 깨어있는 쿨한 남자가 되고 싶었다. 모든 것을 아는 척하고 모든 상황을 이해하는 척하는 것이 남자답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연애에 있어서도 쿨 냄새를 풀풀 풍기며 상대방을 이해하는 척, 위로하는 척하며 척척박사가 되어버렸다. 생각해보면 나의 연애관은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했던 것 같다.
그녀에게 고백하기 전부터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 것을 정황상 알고 있었다고 예전에 소개팅 글에서 이야기를 했다. 그 남자와의 관계가 어쨌든 결국 그녀는 나를 선택하였고, 솔직히 그 관계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그녀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이상한 자존심도 있었고 나 스스로를 쿨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그 상황을 이해하고 대수롭지 않은 척 그냥 넘겨버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어느 날, 그녀는 친구들과 이번 주말 동안 가평으로 여행을 간다고 나에게 이야기를 했다. 한 달 전부터 잡혀있던 선약이라 혼자만 빠지기 조금 그렇다며 상황을 설명했다.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걱정 말고 재밌게 잘 다녀오라고 괜찮은 척 이야기를 했고, 그렇게 며칠 후 그녀는 주말 동안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출발을 했다고 카톡을 보냈고, 휴게소에서 무엇을 먹었고 마트에서 장을 봤고 저녁은 무엇을 먹을 거라며 등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펜션에 잘 도착했다며 그녀의 사진들을 보내주었고, 나는 역시 너무 예쁘다며 많이 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 연애 초반이 주는 정말 애틋했던 감정이라, 주말 동안 그녀를 보지 못한다는 마음에 그녀가 무척이나 그리웠다. 그런데 그녀가 보내줬던 사진들의 각도를 유심히 살펴보니, 일부러 주변을 자른듯한 구도의 느낌이 났다. 무언가 모를 이상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에이, 설마 하는 마음에 의심을 거기서 멈춰버렸다. 구차하게 전화 아니면 영상 통화를 걸어 나의 의심을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녀에게 누구와 여행을 갔는지 직접적으로 물어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쿨한 남자기 때문에 사소한 의심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걸까. 복잡한 마음을 잠시 접고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다. 둘러보기 탭에서 우연히 그녀가 보내줬던 사진의 펜션 전경이 보였고, 슬라이드를 해서 넘겨보니 그 사진 속에 그녀가 있었다. 어떤 남자의 인스타그램 속 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