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삶에 대하여

[시네마에세이스트] 끝없음에 관하여 리뷰

by 모퉁이극장
"이 법칙(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면 모든 것은 에너지이며 절대 파괴되지 않는다. 무한히 존재하며 한 가지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뀔 뿐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너는 에너지고, 나도 에너지야. 그리고 너의 에너지와 나의 에너지는 영원히 존재하는 거야. 새로운 것으로 형태가 바뀔 뿐이지. 이론적으로 우리 둘의 에너지는 다시 만날 수 있어. 수 백만 년이 지난 후에, 그때 어쩌면 너는 감자가 되거나 토마토가 될지 몰라."


<끝없음에 관하여> 대사 중에서




어느 날 내가 병에 걸렸음을 알았을 때, 허무했다. 내가 이렇게 죽는다면 내가 지금까지 이루어왔던 작은 성취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은 죽고 나면 그뿐이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텐데 내가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고 10년 넘게 직장생활도 하고 있었지만, 여기서 그만 죽는다고 해도 그다지 아쉽게 생각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못한 사고로,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 원인 모를 병에 몸이 이미 잠식당해서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내가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체감’은 없었다. 하지만 ‘병’의 존재가 나를 갑자기 ‘유한한 존재’임을 각인시켜 주었다.


병세가 심각하거나 예후가 좋지 않은 병은 아니었지만 평소 병원에 가는 것을 꺼려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에 잘 가지도 않았고 주사도 맞기 싫어하는 겁쟁이기도 해서 몸에 칼을 댄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공포스러웠다. 건강하다고 생각해왔고 자각증상이 없어 사실 그다지 아프지도 않은데 병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병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시간이 매우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내가 내 삶을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듯 3자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순간들이 문득문득 찾아왔다.


치료를 위해 1인 차폐실에 3박 4일 입원했는데, 차폐실은 의료진도 들어오지 않고 외부와 격리된 시설이었다. 방사선 누출 우려 때문에 유리창은 전면 통창으로 여닫을 수가 없었고, 화장실은 있었지만 조그만 세면대만 갖추고 있어 세수 외에 머리를 감거나 샤워도 할 수 없었다. 삼시 세끼 밥을 받을 때만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나마도 문 앞에 도시락을 두고 가기 때문에 사람은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72시간을 외부와 차단된 채 오롯이 혼자만 있었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24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말할 대상이 없어 혼잣말을 내뱉고, 이리뒹굴 저리뒹굴 하며 책을 읽다 지쳐서 멍 때리다 보니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왜 그런 것인지 좋았던 일보다는 부끄러웠던 일, 후회되는 일들이 더 많이 생각났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부끄러워 혼자 이불킥을 날리고, 그때 그렇게 하지 말고 다른 선택을 했으면 지금과 달라졌을까 생각하며 가지 못한 길을 상상했다. 그렇게 나는 우습게도 이 차폐실을 나가면 그런 바보 같은 짓은 더이상 하지 않으리라, 앞으로는 다른 선택도 해보리라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먼지 같이 사라져 버릴 인간의 삶, 의욕도 없고 세상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었는데, 갑자기 삶에 대한 의욕에 불이 붙었다. 이왕에 사라져버릴 먼지 같은 내 인생, 남은 시간 동안 활활 불타올라 깨끗하게 미련없이 사라지리라 혼자서 결의를 다졌다.


차폐실을 퇴원한 지 이제 5년이 되어 간다. 나는 다시 지나고 나면 부끄러울 일들을 하고 후회되는 선택을 하면서 지낸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 이후로 나의 유한한 삶을 자각하며 더 열심히 더 부지런히 부끄럽고 후회되는 일들을 벌이면서 삶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보같은 인간의 삶은 반복되는 것인가.


영화 <끝없음에 관하여>를 보면 32장면의 사연을 붙여놓은 연작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영화속에서 ‘어떤 남자를 보았다’, ‘어떤 여자를 보았다’라고 하면서 타인의 삶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32개의 장면들은 밝고 행복한 모습보다는 어딘지 불편하고 거북한 장면들로 이루어져 관찰자의 입장에 놓인 관객들도 나와는 분리된 난해한 그림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의 투병시절이 떠올랐다.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이상하고 불편한 일들이 일어나는 인간의 삶과 부끄럽고 후회되는 일들이 점점이 박혀있는 내 삶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3자의 시선으로 볼 때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인생에 걸쳐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저 그렇게 끝없이 과오를 반복하며 그러나 그럼에도 다시 잘 살아보기를 결심하며 그렇게 끊임없이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 리뷰는 시네마에세이스트 모리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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