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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퉁이극장 Oct 28. 2022

일상의 스냅 샷은 영화로 연결 된다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를 보고 작성한 에세이 입니다.

윤해정

*이 글에는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긴 교복 치마를 치렁치렁 입고 짧은 컷드 머리를 한 ‘맨발’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다. 귀엽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세상에 불만이 많은가 보다 생각했는데, 학구적인 천문학도 ‘킥보드’, 큰 키에 검도를 잘하는 ‘블루 하와이’를 만나서는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변했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의 즐거움, 나에게도 저런 시기가 있었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귀여운 소녀의 꿈은 <무사의 청춘>이라는 10대 사무라이 영화를 찍는 것. 마음에 드는 주 인공이 나타나면서 영화는 찍으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에서 반드시 찍어야 하는 목표가 되었다. 학교 최강 노안 대디 보이는 주인공의 상대역으로, 다양한 조명을 달린 자전거는 조명으로, 귀가 밝은 친구들은 음향을 맡게 된다. 열악한 환경 속에 어색한 사이는 촬영이 진행될수록 익숙해진다. 촬영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삐걱거림은 위기가 되었다. 물론 영화는 위기를 잘 극복하고 해피엔딩을 향해 간다. 이렇게 즐겁게 끝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반전 엔딩이 등장한다. 뭔지 모를 불협화음이 더 신선했다.

10대의 무모함은 재치 있고 발랄하다. 세상의 편견과 부모님의 잔소리 같은 현실의 벽이 존재하지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와 패기는 그 시절의 특권 같은 것이니까. 물론, 혼자가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친구가 있으니까. 

시험까지 치고 입학한 남녀공학 P고등학교에서 나는 겉돌고 있었다. 엄청난 학습량에 적응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경제적 압박감과 상대적 박탈감에 학교는 더 이상 즐거운 곳이 아니었다. 아침에 눈 뜨기가 죽기보다 싫어지면서 지각은 점점 늘어갔고, 학교생활은 더더욱 지옥 같았다. 1학년 가을, 나는 전학생이 되었다. 낯선 동네의 D 여고에서 시작된 하루는 아직도 영화 속 장면처럼 남아있다. 50명이 넘는 친구들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던 순간의 긴장감, 어색한 나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 준 동화와 경선이. 가입할 동아리를 찾는 나에게 ‘생물부’에 들어오라며 따뜻하게 이야기해준 장미. 그렇게 나는 친구들을 통해 한 학 기가 늦은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하게 되었다.

내가 들어 간 ‘생물부’는 알고 보니 생물부를 가장한 ‘환경’동아리로 나뭇잎의 엽록소를 제거하고 투명한 잎맥이 보이는 일반적인 생물부 활동 따위는 없었다. 체르노빌 사건으로 핵발전의 위험성을 배우고, 우유갑을 분해해 재생종이를 만들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열과 성을 다해 학예제를 준비하던 시간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썸머 필름을 타고’ 속 장면들을 다시 기억해 보니, 나의 10대 시절이 같이 떠올랐다. 시험이 끝나는 날은 친구네 집에 모여 19금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 보는 게 더 설레던 아이. 만우절 날이면 하얀 발목 양말 대신 컬러 양말을 신고 등교하던 동기와 선후배들. 장난끼 가득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 살신성인 몸을 사리지 않던 친구들. 학예전을 준비하느라 늦은 귀가를 해도 피곤한 줄 모르고 신났던 시절, 친구들과 함께 지내던 장면들은 하나하나 눈앞에 살아 있는데, 생각해 보니 30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 시절 일상의 장면들이 스냅샷처럼 남아 지금도 영화를 보면 옛 기억과 연결된다. 시간이 지나도 영화의 레파토리는 계속 이어져 가는 이유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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