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질 결심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고 작성한 에세이 입니다.

서하나

* 이 글은 영화 <헤어질 결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서래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긴장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똑바른 사람은 드물어요. 난 그게 서래씨에 관해서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사는 이 영화에 대해서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꼿꼿함이란 뭘까요. 사랑은 꼿꼿함을 발견해 주는 일일까요. 꼿꼿하게 지탱해주는 걸까요. 아니면 차라리 붕괴될 수도, 붕괴할 수도 있는 걸까요.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보았습니다. 한 번은 송서래가 되었고 한 번은 해준이 되었습니다. 산해경에 나올법한 산도깨비 같은 여자 송서래. 삶과 죽음에 초탈한 그의 괴랄한 장난기를 이해하고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동질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동질감일까요. 나는 그녀를 오해하면서 몰입했던 것은 아닐까요. 녹아내리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앞에 고개를 숙이고 남몰래 웃는 서래를 마침내 우는 사람이라고 단정짓는 해준의 정황은 이 동질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해의 표상이며 도깨비장난 같은 것인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도 스스로만 아는 은밀한 자부심 있나요? 그런 사람들만이 가지는 기묘한 아우라를 동류의 사람들은 냄새처럼 눈치 챕니다. 어디서 맡아 본 냄새. 습지에 피어오른 화려한 광대버섯의 향기처럼 냄새가 같은 사람은 같은 사람을 쉽게 알아봅니다. 냄새의 출처와 원인까지 알려면 그 비밀을 알아야 하니까. 산과 바다 중에 바다를 좋아하고 사진과 텍스트 중에 사진을 택하는 사람. 해준은 서래처럼 자신만의 자부심이 있고 그것은 은은한 품위로 표출됩니다. ‘현대인치고는’ 품위 있는 모양새로. 영화에 등장하는 ‘꼿꼿함’과 ‘품위’는 일반적인 문법을 이탈합니다. 일종의 영화적 허용. 극 속에서만 통용되는 사랑이라는 유구한 파괴적 에너지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버섯의 포자처럼 은밀하게 서로에게 날아가 서로의 습기를 먹고 자라나는 감정. 그것에 대해 극 밖의 나는 상처입고 붕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기꺼운 붕괴입니다. 무너지기로 결심했다면 더 처절하고 돌이킬 수 없도록 무너져야 합니다. 서래가 파놓은 구덩이 앞 모래산처럼. 파도가 덮쳐오면 응당 무너질 수밖에 없는 순리를 지켜보면서. 

무너질 결심을 했다면 먼저 나의 꼿꼿함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나의 품위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나의 꼿꼿함은 눈과 눈 사이 미간에 있는 점에 있습니다. 한 번 본 사람은 콧대의 시작점에 있는 이 점을 잊지 못하는데 나는 나의 에너지가 모두 이 점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습니다. 우주 빅뱅의 시작이 끈에서 시작된 것처럼 나의 시작은 이 점의 좌표로부터 파생되었다고. 누군가 나에게 매료된다면 이 점 탓이다. 누군가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이 점 탓이다. 이런 은밀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눈과 눈 사이 제 3의 눈처럼 자리한 이 지점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점이야 말로 나의 역사를 오롯이 이해하고 기록하고 있는 아카식레코드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점을 없애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혼자가 아니다. 나에게도 서래와 해준 같은 사랑이 찾아온다면, 붕괴의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 때 나는 나의 점을 미련 없이 뽑아버릴 작정입니다. 철저히 붕괴되고 철저히 혼자인 나로서의 국면을 기대해 보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꼿꼿함’, ‘품위’ 즉 은밀한 자부심이라는 것은 이렇듯 타인의 기대와 평가와는 완전히 무관한 세계인지도 모릅니다. 광대버섯은 습지에서 조용하게 자라나지만 화려하고 아름답고 중독성이 있다는 사실. 산에 살던 포자가 바다까지 가서 완전무결해질 수 있다는 사실만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