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라시압 궁전터에 오르다
여기 이 황량한 구릉지가 바로 현장 스님이나 혜초 스님이 본 강국이었습니다. 도시국가들의 연합체 성격을 띠던 이곳은 8세기 이후 아랍 세력의 침입으로 도시가 더 확대되었다가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지요. 아프라시압 구릉지에서 남서쪽으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지금의 사마르칸트 시가지는 나중에 티무르 시절에 재건된 곳입니다. 이곳은 오랜 세월 폐허인 채 남아 있었지요. 시간에 더께가 앉으면서 흙도 덮이고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대 중반부터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아프라시압 유적지의 전체 면적이 2.2제곱킬로미터라니 그 크기가 얼추 지름이 1.6킬로미터인 원과 비슷하겠네요.
지금은 초록색 풀과 누런색 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메마른 구릉지일 뿐이지만 그 아래로는 천년 넘게 잠자고 있는 역사가 있습니다. 풀 사이로, 관광객이 밟아 길이 난 자국이 뚜렷합니다. 그 길을 따라 오늘도 한 무리의 관광객이 걸어갑니다. 얼마 걷지 않아 주차장에서 보았던 검은색 돌로 만든 안내문과 똑같은 것이 또 보입니다. 간단한 설명과 그림으로 이곳에서 꺾어 들어가면 발굴된 유적지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검은 안내석을 이정표 삼아 오른쪽으로 꺾어 오르막길을 오릅니다.
소그디아나의 오아시스 도시들의 구조도 내성과 외성이 있는 비슷한 구조입니다. 토프락 칼라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남아있던 궁전 영역을 둘러보았고, 히바의 이찬칼라도 내성의 안쪽 영역이었지요. 부하라에서 위용을 자랑하던 아르크도 내성이었어요. 그 안쪽에 극히 일부분만 남아있던 왕과 고위층이 거주하는 영역을 둘러보았었지요.
아프라시압에서도 가장 높은 지역인 내성 안쪽은 왕이나 고위층이 거주하는 도시의 중심 공간입니다. 내성과 외성 사이는 관청, 주거지, 시장, 사원, 캐러밴사라이 등 일상생활을 하는 공간이었고, 외성 바깥은 교외 주거 구역이었다고 합니다. 아프라시압은 9세기 이후 점점 국제적인 교역의 도시로 확장됩니다. 그래서 도심 역할을 하던 내성의 남쪽에 새로운 내성을 만들고 더 크게 외성으로 둘러쌌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나중에 만들어진 내성의 안쪽, 신도심이었던 곳입니다. 결국 아프라시압 도시국가는 내성 두 개, 외성 두 개, 모두 네 개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지역이 되었습니다. 이곳 성에는 열두 개의 문이 있었는데, 네 개의 문은 위치와 이름이 전해집니다. 문의 이름은 국제교역 도시답게 그 문으로 나가면 어떤 곳으로 갈 수 있는지에 따라 정해졌나봅니다. 중국으로 가려면 중국 문, 부하라로 가려면 부하라 문, 그렇게요.
이곳 둔덕에 올라서서 주변을 훑어봅니다. 제자리에서 천천히 한 바퀴 돌며 가상현실처럼 성벽을 세우고 궁전을 세우고 길거리에서 왁자한 사람들도 상상해봅니다. 지금은 풀과 흙으로 덮인 곳이지만 천 년 동안이나 사람들이 번성했던 곳이니까요. 고고학적인 발굴은 19세기 말에 시작되었지만 1965년에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를 잇는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사전 발굴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유구와 유적들이 드러났지요. 기원전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화층도 발굴되었고, 7세기 무렵의 궁전과 사원, 주거지와 목욕탕 등의 30여 기의 건물과 많은 양의 유물, 무엇보다도 관심을 끄는 벽화가 출토되었지요. 잘려 나간 흙더미 속에서 벽화 조각들이 발견되었지요. 궁전의 위층에서는 12세기 몽골군 침략 이전까지 존재했던 도시의 흔적도 발견되었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발굴하고 나서 아프라시압 도시국가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제대로 복원하지 못할까 염려되었던 당국에서 유물만 박물관에 전시하고 유구는 다시 묻은 거지요. 그래서 유구는 볼 수 없고 흙과 풀로 덮인 구릉지만 보입니다. 둥글둥글하게 담장 모양으로 구획이 남은 일부 영역에서 천년도 전의 아프라시압 주거지를 상상해볼 뿐입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은 벽화입니다. 이곳의 궁전에서 7세기 무렵의 벽화가 발견되었지요. 동서남북 네 개의 벽면에 11미터씩 그린 총 44미터 길이의 커다란 벽화에 세계가 감탄하며 놀랐지요. 7세기 소그드에 대한 전해지는 기록이 거의 없는 실정에서 거대한 벽화는 당시의 종교, 정치, 외교, 문화에 대한 소중한 자료를 담고 있었으니까요. 일행 중의 한 명은 오로지 이 벽화를 보기 위해서 이번 여행에 참가했다고 말할 정도이니 얼마나 귀중한 유물인지 기대가 부풀어 오릅니다. 걸음을 서둘러 박물관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