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혜영 Mar 16. 2024

녹록지 않은 내 자리, '환대'의 다른 말입니다


2024년은 우리 가족 모두 새내기의 마음이 되는 해다.


실제로 아들은 고1 신입생이 되었고 고3이 된 딸은 미루고 미루던 고등 공부라는 것을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better late than never. 안 하는 것보단 나은 법이지요), 남편은 지천명의 나이에 부서 이동과 함께 난생처음 하는 업무를 맡아 일을 새로 배우느라 고전 중이다. 나는? 교직 24년 차에 처음으로 기피학년 1위인 초등 1학년 담임을 맡았으니 드디어 올 것이 온 것! 그러니 현재 우리 가족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삶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중이다.


아침 6시 53분 학교 셔틀버스를 놓치면 등교가 어려운 아들을 깨우기 위해 6시에 일어나면서 아침 기상 시간은 강제로 30분쯤 빨라졌다. 아들에게는 "딱 일주일만 6시 기상을 체크해 주겠으니 일주일간 스스로 적응하라"고  둔 상태였지만, 예고 방과 후 수업이 있는 날은 밤 9시가 넘어 끝나니 집에 오면 10시 30분이 넘는다. 방과 후 수업이 없는 날로 골라 다른 학원 일정을 잡느라 아들은 주말까지도 푹 쉴 시간이 없다. 그런 아들을 보니 또 엄마 마음이 약해진다.


첫 일주일만 기상 시간을 체크해 주겠다고 엄포를 뒀지만 이런저런 할 거리가 많아 일찍 잠들지도 못하는 아들이 혹시나 못 어날까 봐 6시만 되면 가만가만 아이 방 쪽을 살핀다. 그리고는  아이 방 앞 욕실에서 들려오는 시원스러운 샤워 소리에 돌아 나오며 휴, 안도한다. 아들은 가벼운 샌드위치를 서둘러 먹고 셔틀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15분여 새벽을 뚫고 달려간다. 이런 아들의 아침을 보면서 어찌 어미가 게으를 수 있으랴. 아이의 먹을 것을 마련해 둔 뒤, 아침 20분을 필사로 채운다.


아이가 어릴 때는 스스로 밥숟가락 떠먹을 수 있기만, 스스로 제 몸을 씻을 수 있기만, 스스로 읽고 쓸 수 있기만... 그렇게 어미 손의 도움 없이 스스로 제 몸 하나 건사할 수 있기만을 바랐었다. 그런데 아이는 어느새 아빠만큼 커져서 이제는 밥을 차려주는 것 외에 어미의 손길이 크게 필요치 않다. 육아에 재능이 없는 엄마라 늘 마음 한편에 숨겨놓은 미안함을 달리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이렇게 묻는다.

"아들, 안 힘들어?"

"별로"라는 짧은 답변에 숨어있는 아이의 진짜 마음까지 헤아리기 위해 표정과 말투를 살피게 되는 것. 어쩔 수 없는 어미 마음이다. 고된 생활을 앞으로 3년 동안 나가야 한다니... 자신을 쏟아붓는 '3년의 기적'믿으면서도 아이 스스로가 감당해야 무게가 조금은 가볍기를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반면, 끝이 없을 것 같은 막막함에 힘들어하던 딸아이는 이제 임박해 온 엔딩을 비로소 실감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예민하게 굴던 아이가 막상 고3 생활이 시작되자 오히려 조용히 지내는 걸 보면.


대입을 앞둔 상위 몇 퍼센트의 학생들만 학교와 공부의 중압감이 버거운 건 아니다. 보통의 아이들이 일반 고등학교에서 자신의 남다른 재능을 선보일 기회가 과연 있기는 할까. 그래도 하교 후 전화해서 "엄마, 용돈 please!"를 외치는 딸아이의 명랑한 목소리에 한결 마음이 놓인다. "그런 건 안 빼먹는구먼!" 하며 눈을 흘기면서도 한편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아이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서. 소화에 좋다는 양배추 참치 볶음을 꼭 자기 손으로 해 먹는 딸의 식습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존재가 가장 빛나지 않을 때에도 스스로를 지켜내는 방법을 터득해 가는 아이. 기특하면서도 애틋하다.


비쥬얼은 별로여도 부글거리던 딸의 위와 장을 가볍게 해 주는 음식, 양배추 참치 볶음. 자취생 강추드려요.^^ by 정혜영


늦은 시각, 불을 켜둔 채로 잠든 아이 방의 불을 끄고 돌아오며 어미는 또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성적으로 한 줄 세우는 현재에 위축되고 상처 입은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어서 빨리 이 시기가 지나가게 하소서.


새로 맡은 업무가 손에 익지 않아 늦은 나이에 모처럼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남편. 처음으로 맡은 1학년 담임 역할에 맞추느라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적응 기간을 보내고 있는 나. 어느 것 하나 쉽진 않다. 그래도 힘든 하루를 보냈을 서로를 알아주고 격려할 수 있는 '연륜'이라는 것이 우리 부부에게도 생긴 듯하다.

젊었을 땐 세상에서 제일 힘든 사람이 나 혼자 뿐인 것 같아 상대의 고됨까지 헤아릴 여유가 없었는데, 이젠 평소보다 늦은 퇴근 후, "오늘도 고생했지?" 한 마디쯤 건네는 마음의 자리가 있다. 외피의 주름이 수록 내피의 그것은 줄어드는 것 같은 착각. 나이 듦의 매력 중 하나이려나.


김현경 작가는 <사람, 장소, 환대>에서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고 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라며.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라는 말에 오래 눈길이 갔다.

우리 각자가 한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소속감을 느끼는 데는 자리를 내어주는 저마다의 신경 씀이 필요하구나. 내게 주어진 자리가 환대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달라진다. 나를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나의 자리, 나의 장소. 그 의미를 새롭게 새긴다.


고1 신입생이 된 아들과 고3 대입을 앞둔 딸, 지천명에 새 임무를 부여받은 남편과 나.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각자의 소임을 충실하게 해내어 올해 말, 각자의 사람다움을 웃으며 확인할 수 있도록 서로 열심히 응원해야겠다.


당신의 자리, '환대'의 다른 말입니다. (사진 출처: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아들의 합격이 가져다준 뜻밖의 고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