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아들은 고1 신입생이 되었고 고3이 된 딸은미루고 미루던 고등 공부라는 것을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better late than never. 안 하는 것보단 나은 법이지요), 남편은 지천명의 나이에 부서 이동과 함께 난생처음 하는 업무를 맡아 일을 새로 배우느라 고전 중이다. 나는? 교직 24년 차에 처음으로 기피학년 1위인 초등 1학년 담임을 맡았으니 드디어 올 것이 온 것! 그러니 현재 우리 가족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삶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중이다.
아침 6시 53분 학교 셔틀버스를 놓치면 등교가 어려운 아들을 깨우기 위해 6시에 일어나면서 내 아침 기상 시간은 강제로 30분쯤 빨라졌다. 아들에게는 "딱 일주일만 6시 기상을 체크해 주겠으니 일주일간 스스로 적응하라"고 말해 둔 상태였지만, 예고 방과 후 수업이 있는 날은 밤 9시가 넘어끝나니 집에 오면 10시 30분이 넘는다. 방과 후 수업이 없는 날로 골라 다른 학원 일정을 잡느라 아들은 주말까지도 푹 쉴 시간이 없다. 그런 아들을 보니 또 엄마 마음이 약해진다.
첫 일주일만 기상 시간을 체크해 주겠다고 엄포를 뒀지만 이런저런 할 거리가 많아 일찍 잠들지도 못하는 아들이 혹시나 못 일어날까 봐 6시만 되면 가만가만 아이 방 쪽을 살핀다. 그리고는 아이 방 앞 욕실에서 들려오는 시원스러운 샤워 소리에 돌아 나오며 휴, 안도한다. 아들은 가벼운 샌드위치를 서둘러 먹고 셔틀을 놓치지 않기 위해자전거를 타고 15분여 새벽을 뚫고 달려간다. 이런아들의 아침을보면서 어찌어미가게으를 수 있으랴. 아이의 먹을 것을 마련해 둔 뒤, 아침 20분을 필사로 채운다.
아이가 어릴 때는 스스로 밥숟가락 떠먹을 수 있기만, 스스로 제 몸을 씻을 수 있기만, 스스로 읽고 쓸 수 있기만... 그렇게 어미 손의 도움 없이 스스로 제 몸 하나 건사할 수 있기만을 바랐었다. 그런데 아이는 어느새 아빠만큼 커져서 이제는 밥을 차려주는 것 외에 어미의 손길이 크게 필요치 않다. 육아에 재능이 없는 엄마라 늘 마음 한편에 숨겨놓은 미안함을 달리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이렇게 묻는다.
"아들, 안 힘들어?"
"별로"라는 짧은 답변에 숨어있는 아이의 진짜 마음까지 헤아리기 위해 표정과 말투를 살피게 되는 것. 어쩔 수 없는 어미 마음이다.이 고된 생활을 앞으로 3년 동안 해 나가야 한다니...자신을 쏟아붓는'3년의 기적'을 믿으면서도 아이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무게가 조금은 가볍기를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반면, 끝이 없을 것 같은 막막함에 힘들어하던 딸아이는 이제 임박해 온 엔딩을 비로소 실감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예민하게 굴던 아이가 막상 고3 생활이 시작되자 오히려 조용히 지내는 걸 보면.
대입을 앞둔 상위 몇 퍼센트의 학생들만 학교와 공부의 중압감이 버거운 건 아니다. 보통의 아이들이 일반 고등학교에서 자신의 남다른 재능을 선보일 기회가 과연 있기는 할까. 그래도 하교 직후 전화해서 "엄마, 용돈 please!"를 외치는 딸아이의 명랑한 목소리에 한결 마음이 놓인다. "그런 건 안 빼먹는구먼!" 하며 눈을 흘기면서도 한편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아이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서.소화에 좋다는 양배추 참치 볶음을 꼭 자기 손으로 해 먹는 딸의 식습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존재가 가장 빛나지 않을 때에도 스스로를 지켜내는 방법을 터득해 가는 아이. 기특하면서도 애틋하다.
비쥬얼은 별로여도 부글거리던 딸의 위와 장을 가볍게 해 주는 음식, 양배추 참치 볶음. 자취생 강추드려요.^^ by 정혜영
늦은 시각, 불을 켜둔 채로 잠든 아이 방의 불을 끄고 돌아오며 어미는 또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성적으로 한 줄세우는 현재에 위축되고 상처 입은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어서 빨리 이 시기가 지나가게 하소서.
새로 맡은 업무가 손에 익지 않아 늦은 나이에 모처럼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남편.처음으로 맡은 1학년 담임 역할에 맞추느라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적응 기간을 보내고 있는 나. 어느 것 하나 쉽진 않다. 그래도 힘든 하루를 보냈을 서로를 알아주고 격려할 수 있는 '연륜'이라는 것이 우리 부부에게도 생긴 듯하다.
젊었을 땐 세상에서 제일 힘든 사람이 나 혼자 뿐인 것 같아 상대의 고됨까지 헤아릴 여유가 없었는데, 이젠 평소보다 늦은 퇴근 후, "오늘도 고생했지?" 한 마디쯤 건네는 마음의 자리가 있다. 외피의 주름이 늘수록 내피의 그것은 줄어드는 것 같은 착각. 나이 듦의 매력 중 하나이려나.
김현경 작가는 <사람, 장소, 환대>에서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고 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라며.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라는 말에 오래 눈길이 갔다.
우리 각자가 한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소속감을 느끼는 데는 자리를 내어주는 저마다의 신경 씀이 필요하구나. 내게 주어진 자리가 환대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달라진다. 나를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나의 자리, 나의 장소. 그 의미를 새롭게 새긴다.
고1 신입생이 된 아들과 고3 대입을 앞둔 딸, 지천명에 새 임무를 부여받은 남편과 나.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각자의 소임을 충실하게 해내어 올해 말,각자의 사람다움을 웃으며 확인할 수 있도록 서로열심히응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