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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Aug 25. 2024

서투른 마음은 우연을 인연으로 만든다


인연은 늘 우연처럼 다가온다.


기존 오카리나인 줄 알고 신청했던 오카리나 연수가 알고 보니 호흡법이나 운지가 너무 다른 '한국식 오카리나'였다. 어린아이처럼 손가락 운지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젠 내 마음의 힐링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대상이 되었다.

처음 운지를 배우느라 손가락과 손목이 너무 아파서 '이거 계속해, 말아?' 고민할 땐, 내가 한국식 오카리나 교원 앙상블, '강물처럼'의 단원이 되어 고양 아람누리 새라새 극장에서 3번째 정기 공연을 맞이하게 될 줄 꿈엔들 알았으랴.


블로그 이웃님의 글을 보고 우연히 '브런치'라는 글쓰기 플랫폼을 알게 되었다. 작가 신청을 하고 합격이 된 후에야 글을 쓸 수 있다기에, 호기심에 한번 신청했다 덜컥 합격되는 바람에 생애 처음으로 '독자'가 있는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내 글을 정성 들여 읽어 준다는데 고무되어 흰 자판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판을 두드렸을 때에도 내가 이곳을 4년째 지키며 여전히 '어떤 글을 쓸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을 줄 알았겠는가.  


지금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것들 중 그때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게 몇 가지나 될까. 그러므로 한번 스쳐 갈 줄 알았던 우연이 오래도록 함께 하며 인연으로 남은 것들은, 귀하다.


온라인 필사 모임과 캘리그래피는 비교적 최근에 시작한 일들이다. 필사 모임과 인연이 된 것은 우연히 만난 문장 때문이었다.

블로그에 서평을 주로 쓰는 지인이 어느 날부터 문장 필사를 한다는 걸 알았다. 보아하니, 매일 문장을 필사해 블로그에 글과 함께 올리고 있었다. 문장을 필사한다는 데 마음이 끌렸지만, 매일 양질의 글을 쓸 자신이 없었다. 일기처럼 가볍게 쓰면 될 텐데, 마음의 핑계가 컸다. 그러나 잦은 발걸음을 붙드는 문장이 있었으니,


그 어떤 상처도 남의 도움으로만 아물지는 않거든. 모든 상처는 안팎으로 아문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스스로 아무는 거야.
<고고의 구멍>, 현호정


4월 21일에 올라온 지인의 이 필사 문장에 난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나의 과거와 현재가 일시에 연결되며 꼭꼭 눌러둔 감정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소용돌이치는 느낌. 필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문장을 쓰는 작가도 알고 싶고 전체 이야기도 궁금했다.

그날 난 지인이 속해 있던 온라인 필사 모임, '꿈필(꿈을 이루는 필사)'에 가입했고, 방장이 매일 아침 6시에 올려주매일 필사 첫 문장을 썼으며, 현호정의 소설 고고의 구멍온라인으로 주문했다.

오래전부터 망설이던 마음은 우연한 계기가 트리거가 되어 모든 일을 쓰나미처럼 한꺼번에 몰고 다. 정작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서히 준비해 왔던 건지, 그 쓰나미를 기쁘게 누렸다.


그렇게 시작한 매일 필사는 오늘로 125일째를 맞았다. 필사 100일, 200일을 맞은 필친(필사 친구들)들이 매일 필사하고 글을 써서 올리는 오픈채팅방에 자축 선물(작은 간식) 쏘기 이벤트를 다. 그럴 때마다, '그리 오랜 날 매일 필사를 해내다니, 와, 대단하다!'고만 생각했지, 내가 그 주인공이 될 거라는 데엔 물음표였다. 

필사 100일을 맞아 간식 쏘기 자축 세리머니를 하면서 '오래가려면 함께 가라'던 말의 힘을 실감했다. 함께 하는 이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며 축하해 주는 다정한 말들에 힘입어 처음엔 엄두 못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필사 1일차와 100일 차 문장들 by 정혜영


다니던 화실 상황이 변하는 바람에 캘리그래피 공방으로 옮겨 캘리그래피를 배우기 시작한 지 3개월 차, 주 1회 13회 차 수업이 끝났다. 그동안 캘리 선생님은 수강생의 마음을 붙들만한 다양한 프로그램-책갈피 만들기, 족자 쓰기, 액자 만들기, 컵에 캘리 문구 넣기 등-을 시도하셨지만, 마음에 남는 것은 그런 도구적인 것이 아니었다. 찌릿하게 마음을 울리는 문구가 나만의 글씨체로 기록된다는 건 그 자체로 멋진 일이다.


재능이 많으신 온라인 필사 모임 방장님이 온라인으로 지도해 주는 캘리 클래스도 가입해 매일 감사 문구와 좋은 문구 쓰기를 연습했다. '감성 공장'이라는 앱을 활용해 사진에 캘리를 얹으면 누가 쓴 글이라도 작품이 된다.


매일 연습한 캘리 문구를 감성 공장 앱에 얹다 by 정혜영('그루잠'은 이전 필명이자 블로그 필명이랍니다)

하다 보니, 저절로 다음 꿈이 생긴다. 그것은 캘리그래피 자격증에 도전하는 것. 배워서 남주고 싶은 선생 본능이 그새 무럭무럭 몸체를 키우고 있었나 보다. 좋은 것은 나눌 때 기쁨이 배가 되니 더 열심히 배워서 필요한 이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의도하지 않았지만 한번 시작한 일을 꾸준히 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길로 연결되곤 한다. 우연히 시작한 오카리나로 매년 연주 무대에 서는 것, 계속 쓴 글을 모은 브런치북이 브런치출판프로젝트 대상작이 되어 출간이 되고 다른 출간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가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한다. 미래는 불확실하며 어느 것 하나 보장해 주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일단 시작하고 꾸준히 하다 보면 반드시 다른 무엇인가로 연결된다는 것. 굳이 거창한 목표는 필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시작하는 서투른 초심에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으니. 


인연이 되는 우연은 서투르게 시작하는 마음이 낚아채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기에 집중하능숙해지려면 꾸준한 연습만이 답이다. 그러니 언제든, 서투르게 시작하는 우연을 그냥 지나치지 마시길.


요즘은 물을 많이 섞어 간단하게 표현하는 수채화를 그려 캘리를 얹는 재미에 빠져 있어요. :) by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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